지난 10일 오전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의 도심 한복판 고급 쇼핑몰 엠포리움 건물 옥상에 오르자 흰 벌통 수십 개가 눈에 들어왔다. 꿀벌들은 15층 건물 옥상 정원에 핀 꽃과 벌통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에서 '웽웽' 하는 꿀벌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도시 양봉 업체인 '루프톱 허니(옥상 벌꿀)' 공동 대표인 바네사 키와코스키와 매트 루마라시 부부가 운영하는 양봉장이다.

호주 멜버른 중심가엔 이런 옥상 양봉장이 40여곳, 벌통은 120여개가 있다. 키와코스키씨는 "멜버른시의 식당·호텔·기업 등 각종 건물 옥상에 벌통을 놓고 있다"며 "처음엔 주민들이 조심스러워해 허가받기가 쉽지 않았지만 꿀벌에 쏘였다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고 했다. 이들은 '옥상 벌꿀'이라는 자체 상표를 등록하고 자체 생산한 꿀을 꿀 전문점과 식당 등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멜버른 도시 양봉 업체 '루프톱 허니(옥상 꿀벌)' 바네사 키와코스키(왼쪽) 대표와 김지수 탐험대원이 멜버른 쇼핑몰 '엠포리움' 건물 옥상에 설치된 벌통에서 지난 10일 꿀벌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다.

다음 날 찾은 멜버른대 잔디 광장 한편에는 기다란 나무 기둥이 놓여 있었다. 벌통이었다. 나무통 한가운데가 투명한 유리로 돼 있어 꿀벌이 안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바 '굴뚝 벌통'이다. 이 벌통은 멜버른대 동물 생명 공학센터 소장인 장피에르 샤이 링크 교수가 4년 전 설치했다. 10년 전부터 취미로 양봉하던 장피에르 교수는 '캠퍼스에 벌집을 놓고 사라진 벌들을 모이게 하자'는 취지로 이 벌통을 설치했다. 그는 나지막한 벌통을 잔디밭에 놓으면 학생들이 쏘일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기다란 굴뚝 모양의 벌통을 개발했다. 벌집 기둥에 달린 창을 통해 꿀벌 활동 모습을 누구든 볼 수 있으면서도, 벌이 드나드는 곳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굴뚝 위로만 나있어 안전하다. 장피에르 교수가 말했다. "공공 장소에서 꿀벌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면 기발한 버전의 벌통이 더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인구가 약 380만명인 멜버른시에 등록된 양봉자 수는 1만2000명쯤이다. 호주에서 도시 양봉이 느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꿀벌이 단순 꿀 생산자가 아니라 꽃가루 매개자로서 수분(受粉) 역할을 한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꿀벌이 많이 돌아다니면 도시에 풀과 나무가 풍성해질 가능성도 커진다. 호주에서 양봉업자와 정부를 연결해주는 비영리단체 윈 비 재단(Wheen Bee Foundation) 피오나 체임버스 대표는 "호주에서는 매년 꿀이 1000억달러어치 생산되고 있다"며 "그러나 꿀 생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분자로서의 역할이고, 이를 통해 1조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가 창출된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꿀벌은 최고의 꽃가루 매개자다. 벌이 사라지면 수분을 전적으로 벌에게 의존하는 아몬드·복숭아·살구 등 여러 과일과 채소, 나아가 많은 식물이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최근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지구의 푸르름을 지켜야 할 꿀벌 개체 수는 급감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 도시인들이 '꿀벌을 되살리자. 머리를 맞대보자'고 나서기 시작했다. 멜버른을 비롯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등 선진국 대도시 곳곳에 양봉장이 들어서고 있다. 빅토리아주 양봉가 협회장을 맡은 장피에르 교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대학에서 '꿀벌 강연'을 여는데 보통 300~400명이 모인다고 한다.

도시 양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신선한 꿀을 맛볼 기회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지난 12일 저녁 '옥상 벌꿀'과 협력하는 스페인요리 식당 '아나다'를 찾아갔다. 튀긴 아스파라거스에 식당 건물 옥상에서 채밀(採蜜)한 꿀을 올린 애피타이저를 8000원 정도에 맛볼 수 있었다. 평소 먹던 그 꿀맛이 아니었다. 더 진하고 신선한, 날것 그대로의 신선한 꿀맛이었다.

인간은 벌통을 선물하고 벌은 달콤한 꿀, 그리고 도시의 꽃과 나무를 되돌려준다. 서울시내 옥상 곳곳에서도 꿀벌을 만날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