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경남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국제 음악 콩쿠르. 이변이 생겼다. 예원학교 3학년이던 피아니스트 임윤찬(16·한국예술영재교육원)군이 쟁쟁한 형·누나들을 제치고 최연소 1위를 했다. 확신에 차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하는 더벅머리 소년에게 음악팬들은 열광했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은 임군의 연주를 보고 '리틀 라두 루푸'라고 했다. 루마니아 출신 라두 루푸는 1960년대 미국과 영국의 콩쿠르를 모두 석권한 뒤 지금껏 정상에서 내려온 적 없는 피아노의 전설이다.

"조성진을 이을 재목"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이 소년 뒤엔 스승 손민수(44·한예종) 교수가 있다.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다. 2017년 임군이 한예종 부설 영재교육원의 오디션을 봤을 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뒤늦게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를 치던 임군을 손 교수가 떠올렸다. "요정들이 자글자글하게 춤추는 대목이 있어요. 손끝에 섬세한 감각이 없으면 잘할 수 없는데, 6학년 아이가 정말 잘 친 거예요!"

지난 10일 한예종 연구실에서 피아니스트 손민수(왼쪽)와 임윤찬이 사이좋게 무릎을 맞댔다. "다리를 꼬는 건 태어나 처음"이라며 임군이 어색해하자 옆에서 손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3년째 치아 교정 중인 임군은 "교정기를 끼고 나서 일이 더 잘 풀렸다"며 씨익 웃었다.

알고 보니 임군은 피아노 앞에 한번 앉으면 만족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 '천생 연주자'였다. 수줍은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던 임군이 입을 열었다. "제가 꿈꾸는 음악은 머리에 있는데, 머리가 안다고 손이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할 때까지 멈추지 않아요." 레슨 도중 임군이 헤매는 것 같으면 손 교수는 기꺼이 '광대'가 된다. 곡 분위기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고 마임도 해준다. 멋쩍어하던 임군도 이젠 스승의 손짓 발짓에 시선을 꽂은 채 느낌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나오는 소리가 달라진다.

손 교수는 열여덟 살에 미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건반 위의 철학자' 러셀 셔먼과 그의 아내 변화경을 만나고 "음악에 마음을 붙였다". 셔먼의 집은 사방이 책이다. '율리시스' '신곡' 등 고전을 읽은 뒤 리포트를 쓰게 했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잡지도 의무적으로 읽혔다. 종이 신문도 철하게 했다. 파키스탄 강진 현장 르포, 학자들이 새로운 우주 형성 가설을 세웠다는 소식 등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바흐를 잘 치려면 바로크 댄스를 배워야 한다고 떠민 사람도 셔먼이었다. "미친 듯이 연습해도 영감이 잘 안 떠오른다"고 했을 땐 된통 혼났다. '네가 뭔데 가만히 앉아서 영감이 꽂히길 기다리느냐'는 질책이었다.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온 것 같으면 틀려도 칭찬해줬다. '사람은 생긴 대로 피아노를 친다. 왜 음악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삶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다. 손 교수의 바흐 음반은 2011년 뉴욕타임스 선정 '최고의 음반' 중 하나가 됐다. 클래식 음반으론 드물게 2만장 넘게 팔렸다.

음악가에게 꾸준히 연습하는 매일은 고달픈 일상. 2017년부터 서른두 개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차분히 연주하고 있는 그는 "혼자 연습하다 보면 '이게 세상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럼에도 묵묵히 하는 이유는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매개체가 음악이라서"다. "철학자들이 칸트와 니체를 파고드는 것처럼 저는 베토벤을 탐구해요. 삶의 본질을 사상으로 풀어낸 것처럼 베토벤은 음악으로 풀어냈죠." 오는 9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동시에 음반도 낼 예정인 손 교수는 "나이가 어려도 음악에 초점을 맞춰 살면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윤찬이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다음 달 30일 명동성당에서 임군은 바흐와 베토벤, 쇼팽을 선보이는 독주회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