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의 위대한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가 한 말입니다."

그의 첫 소감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감독을 향한 고백이었다. 소심한 영화광이었던 소년이 자라나 9일(현지 시각) 아카데미 감독상 트로피를 쥐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객석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쏠렸고, 순간 뜨거운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향한 경배도 잊지 않았다. "제 영화를 미국 관객이 모를 때부터 좋아해 줬던 쿠엔틴 타란티노 형님, 정말 사랑한다. 같이 후보에 오른 분들 모두 멋진데, 오스카 주최 측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 해서 나누고 싶다"고 했다. 카메라가 쿠엔틴 타란티노와 샘 멘데스 감독 등의 얼굴을 비췄고 기립 박수가 이어졌다. 할리우드 감독들을 동경하며 자란 한국의 '비디오 키드'가 아카데미 무대를 정복한 순간이었다.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작품상까지… "아… " 무대 뒤에서 털썩 - 시작은 각본상이었다. 9일 아카데미 시상식 초반 봉준호 감독은 각본상 트로피를 거머쥐고 환히 웃었다. 국제극영화상(왼쪽서 둘째)을 받았을 땐 트로피를 치켜들었고, 감독상(왼쪽에서 셋째)을 받고 나선 입을 틀어막았다. 작품상(왼쪽서 넷째)까지 받았을 땐 그의 얼굴에도 충격과 전율이 감돌았다. 네 번이나 무대에 오른 뒤 봉준호 감독은 결국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맨 오른쪽).

◇시대성을 품다

작년 5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직후 봉준호는 "저는 어린 시절 너무 소심한 나머지 집에서 TV 영화를 밤새워 보며 감독 꿈을 꿨던 아이였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스크린' '로드쇼' 같은 영화 잡지를 보며 감독을 꿈꿨던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연세대 사회학과)해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의 첫 단편 '백색인'은 동아리 시절 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것이다.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1999년까지 충무로에서 조연출로 활동했다. '살인의 추억'을 찍기 직전까지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결혼식 비디오를 찍거나 사다리차 같은 제품 사용 설명 비디오를 찍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대학 동기가 쌀을 가져다줄 때도 있었다.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을 바라보는 눈이 이때 싹텄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년)는 흥행엔 실패했지만 지금의 '봉준호 월드'의 뿌리가 된다. IMF 직후 붕괴된 중산층의 불안과 우울이 이 영화에 녹아 있다. 당시 영화를 제작했던 차승재 전 싸이더스 대표는 "봉준호는 개인의 문제를 사회 구조 문제로 끌어올려서 풀어내는 일관된 시선과 블랙 유머로 꼬집어내는 감각이 있었다"면서 "봉준호가 놀면서 천재 된 거 아니다. 인생 전체를 영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왔다. 그 노력으로 아카데미에서 노하우나 기술에 주는 상이 아니라 창작력에 주는 상을 휩쓴 것"이라고 했다.

각본을 쓰고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데 능한 것은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1909~1986)이다. 아버지 봉상균(작고)은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로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뼛속 깊이 새긴 오락성

오락성은 봉준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DNA다. 심각한 주제를 어렵게 다루지 않았고, 쉽고 날카로운 웃음을 추구했다. 모든 이야기는 스릴러 같은 철저히 상업 장르 영화의 틀에서 썼다. 흥행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살인의 추억'은 관객 550만명을, '괴물'은 1091만명을 모았다. '기생충' 한국 관객도 1009만명이었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9일까지 '기생충'의 북미 수입은 3547만달러(약 420억원)이다. 1일 가디언지는 "웃기고 정치적이며 뼈 때리는 한국의 영화가 세계 최고가 됐다"고 썼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한국적 풍경에서 고유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봉준호만의 특이점이다. 가령 '마더'는 대학 시절 농활에서 만난 농촌 부녀자들과 함께 막걸리를 걸치고 트로트 음악을 틀고 춤을 추던 기억을 영화 미학적으로 구현한 작품. '기생충' 역시 반지하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공간을 통해 계급 갈등을 기호학적으로 비췄다.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그 안에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을 뽑아낸다.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의 톰 퀸 대표가 "나는 미국에 살고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 사는데도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혁신은 계속된다

다양한 기술의 변주, 플랫폼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혁신성도 지금의 봉준호를 만들었다. '설국열차'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고, '옥자'로 넷플릭스와도 손잡았다. 미국 드라마 명가인 HBO와 손을 잡고 '기생충'을 드라마로도 만들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은 9일(현지 시각) 시상식 직후 간담회에서 "서울 도심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다룬 한국어 영화와 2016년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영어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