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51)씨는 지난달 7일 판사직에서 물러나 20일 만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법 농단 폭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입당 기자회견에서 "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의) 불의한 압력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블랙리스트 판사가 됐다"고 했다. 민주당도 "이 전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 사법 농단의 최대 피해자"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와 재판 기록에는 이씨의 주장과 상이할 뿐 아니라, '사법 농단 폭로자'와는 전혀 다른 면모의 판사가 등장한다. 이씨가 '불의한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은 양승태 대법원이 2017년 3월 연세대에서 열린 대법원장 인사권 행사의 문제점을 논의하는 학술대회의 개최를 막으라고 이씨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학술대회는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내에서도 가장 이념 성향이 강한 판사들이 모인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이 주도한 행사였다. 이씨도 인사모 소속이었기 때문에 당시 대법원이 그를 통해 이 학술대회 개최를 무산시키려 했지만 단호히 거부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그런데 역시 민주당에 입당한 전직 판사 이탄희씨는 법원과 검찰 조사에서 "2017년 1월 이수진 부장판사가 전화를 걸어와 '행정처 높은 분이 내게 전화를 했다. 대법원에서 학술대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학술대회를 안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탄희씨는 당시 이 학술대회 준비 실무를 총괄하던 인권법 판사였다.

이탄희씨는 이어 "이수진 부장이 당시 또 전화를 걸어와 '사실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이 (대법원의) 이규진 양형실장님이다. 이분은 대법원장을 독대하시는 분이라 행사를 강행하면, 이진만 (인권법) 회장을 그냥 사퇴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규진 전 양형실장은 현 여권에 의해 '양승태 사법 농단'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탄희씨는 또 "이수진 부장이 당시 '내가 이규진 실장님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 사이에 중간 역할을 많이 했다' '내가 행정처 심의관으로 너(이탄희)랑 ○○○을 데려가라고 이규진 실장에게 말했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실제 이씨 등 2명은 2017년 초 행정처로 발령이 났다. 법조계 인사들은 "기록에 나오는 이수진씨의 모습은 양승태 대법원의 입장을 인권법 측에 충실히 전달한 '스피커', 양쪽 모두와 친분이 있는 '경계인'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수진씨는 2017년 이 학술대회를 준비하던 인사모의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내용을 행정처 간부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에 저항하다 '판사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주장도 사실과는 다르다. 그가 '판사 블랙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법원 내부의 '물의 야기 법관' 문건 속 판사 18명 중엔 그의 이름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수진씨는 2017년 2월 법원 정기 인사에서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있던 본인이 3년 근무 연한을 못 채우고 2년 만에 대전지법으로 발령 난 것이 양승태 대법원의 블랙리스트 판사에 대한 '인사 탄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복수의 판사는 법원과 검찰에서 "이수진 부장의 업무 능력 등이 떨어져 전출이 됐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 이들은 "이 부장은 사교의 폭이 넓고 약속이 많아 연구관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거의 매일 야근하는) 다른 연구관에 비해 그는 주 1회 정도만 야근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날 본지 취재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저는 사법 농단의 피해자"라며 "저의 사법 개혁 의지를 저지하려는 분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