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상·감독상·국제장편영화상·각본상 4관왕 쾌거
'92년 아카데미 역사 산산조각' 세계 영화계 주목
불평등·양극화 주제로 세계인의 공감 이끌어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수상하고 있다.

"미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관왕 타이틀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는 물론, 세계 영화사에 새 역사를 썼다.

9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과 각본상 수상으로 4관왕에 올랐다. 아카데미 ‘빅 5’로 불리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중 무려 3개 부문을 휩쓸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스카’로도 불리는 미국 최대 영화 시상식이다. 한국 영화가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국 역사상 100년 만에 처음으로, 1963년 신상옥 감독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아카데미에 첫 도전장을 던진 지 57년 만이다.

◇ 감독상·감독상·국제장편영화상·각본상· 4관왕 쾌거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 잔치’라고 조롱을 받을 정도로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영화제로 평가받았다. 2015~2016년 할리우드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오스카는 백인 중심(#OscarsSoWhite)’이라는 해시태그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 만큼 ‘기생충’의 수상이 갖는 의미는 크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한 마디로 ‘미쳤다’"라고 말했다. 정 평론가는 "아카데미 위원회가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비영어권 영화가 상을 거머쥘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며 "그동안 아카데미상은 상업성이 짙고 대중적인 미국 영화가 주로 받았었는데, 한국 영화가 선정됐다는 건 그만큼 한국 영화가 상업성, 대중성 면에서 최고 정점에 올랐다는 뜻"이라고 평했다.

‘기생충’ 연출진과 출연 배우들이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수상을 축하하고 있다.

각본상 수상의 의미도 남다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뜻하는 각본상 수상은 영화의 아이디어, 주제 의식, 표현적 부분 등을 모두 인정받았다는 걸 의미한다"며 "봉준호 감독과 한진원 작가가 제시하는 영화적 비전에 대한 존중이 들어간 큰 의미가 있는 상"이라고 짚었다.

외신도 오스카를 휩쓴 기생충의 기세를 주목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쥔 최초 작품이 되면서 오스카 92년 역사가 산산조각 났다"며 "백인 영화 제작자들이 들려주는 백인 이야기에 대한 할리우드의 지나친 의존이 마침내 쇠퇴하고 있다"고 했다. CNN도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사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 ‘빈부격차’라는 명백한 스토리로 세계인의 공감 이끌어

‘기생충’은 봉 감독의 7번째 장편영화로, 부자인 박 사장(이선균) 가족과 가난한 기택(송강호) 가족을 중심으로 계층 간 갈등을 다뤘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5월 개봉해 1008만 관객을 모았고, 그해 10월 북미에서 개봉해 약 3300만달러(약 39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현재 미국에서 개봉한 역대 외국어 영화 중 흥행 6위를 달리고 있다.

영화 ‘기생충’.

‘기생충’의 성공 요인은 세계인이 공감할 만한 주제 의식을 갖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 양극화라는 공통의 문제를 통찰력 있게 풍자해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평을 얻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기생충’은 논란의 여지 없이 문법적으로 명쾌하고, 쉽고 대중적이고 코미디적이기까지 하다"며 "세계 어느 나라 관객이 보더라도 감독이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는지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빈부 격차와 자본주의 계급사회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통으로 발생하는 문제"라며 "관객들은 단순히 ‘다른 나라의 영화’가 아닌 자신들의 문제로 공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극중 기정(박소담)이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출신으로 위장해 박 사장 아들의 미술치료사로 들어가거나, 기택이 인디언 분장을 하는 등 영화 곳곳에 미국인들이 친근하게 여길 요소들이 많다는 점도 서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소로 꼽힌다.

실제로 기생충은 각종 해외 영화제를 휩쓸고 있다. 지난해 5월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으로 시작해 지난달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특히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영화는 1956년 ‘마티’ 이후 처음이다.

◇ ‘기생충’으로 ‘로컬 영화제’ 오명 벗은 아카데미

‘백인 잔치’라는 오명을 썼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최근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아카데미는 흑인 피아니스트와 하층민 백인 운전기사의 우정을 그린 ‘그린북’, 멕시코 이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영화 ‘로마’, 퀸의 전기를 영화로 한 ‘보헤미안 랩소디’ 등에 주요 상을 안기며 인종과 성별,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바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두고 ‘로컬’ 영화제라고 발언했던 봉준호 감독.

올해도 아카데미는 한국 영화 ‘기생충’을 통해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의미를 되새겼다. 시상식에 앞서서는 미국 외 국가에 주는 ‘외국어 영화상’의 명칭을 ‘국제장편영화상’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봉 감독은 지난해 10월 한 영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는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그건 매우 지역적인(로컬) 영화제"라고 했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며 자막이 들어간 외국 영화를 배척하는 미국 영화계의 현실을 지적했다.

세계 영화의 중심인 할리우드와 아카데미 영화제가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라는 한국 감독의 발언은 아카데미가 가진 보수성과 폐쇄성을 저격하는 도발로 주목 받았다. 현지 언론들도 ‘기생충’의 수상을 점치며 아카데미의 변화를 촉구했다. NYT 영화평론가 카일 뷰캐넌은 "‘기생충’이 아카데미 역사상 외국어 영화 최초로 작품상을 받으면 ‘백인 일색의 편협한 시상식’이라는 오명을 벗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기생충’에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몰아주며 글로벌 영화제로서 위상을 공고히 했다. 기생충의 오스카 점령은 한국과 아시아 영화사의 새 역사이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에서도 한 획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황 평론가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보수적이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일례로 남녀 배우상 후보 중 유색인종 배우는 한 명뿐이었다"며 "아카데미는 자신들의 포괄성을 만방에 과시하고 세계화를 지향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기생충’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보다, 아카데미의 ‘기생충’ 시상이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