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시민이나 국민 자격으로 사는 우리가 가진 착각이 하나 있다. 착각까지는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근본적 문제임은 맞는다. 그것을 분명하게 자각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되는 하부 단계 일에 많은 혼선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독립하고, 우리 힘으로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하는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외부 힘으로 독립했고, 외부 힘이 작용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 주요 국가는 대부분 내부의 정치 사회 변동을 극복하며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 환경이 오히려 주도적 역할을 했고 우리 내부 자체의 정치적 변동은 대한민국 건국에 중심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독립적 능력으로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 두텁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일부에서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1인칭으로 여기지 않고, 3인칭으로 대할 뿐이다. 이 근본적 토대 인식을 어떻게 지키는가가 내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통일 실현 주체는 민족이 아닌 국가다

국가에 대해서는 아직 근대적 관념을 따라잡지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느 집단에서는 국가보다는 민족이나 진영을 자신들의 1인칭으로 삼는다. 대통령마저도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헌법은 국가를 통제하지 민족을 통제하지 않는다. 국가가 민족 문제를 푸는 것이지, 민족이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한민족 관념이 통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인 것은 틀림없지만, 통일을 실현하는 주체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다. 민족은 근대 민족국가를 지나오면서 제도가 아니라 상상과 감성의 공동체로 남았다. 공동체 의식을 민족에서 찾으면 감성적이고, 국가에서 찾으면 논리적이다. 국가는 감성의 지배를 배격하고 '법'(法)의 지배를 요구한다. 민족은 '법'의 대상이 아니라 문화나 습성이나 막연한 전통의 대상이다. '법'은 논리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말은 중세적 사고로 근대적 조직을 떠맡고 있다는 말과 같다. '법'을 감성으로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것과도 같다. '법'보다 '말씀'이나 '집단의식'이나 '진영'을 앞세우는 것은 근대를 지나는 일이 아니라 중세로 회귀하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중세로 회귀하는 기괴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그저 운동 구호일 뿐

국가가 아니라 진영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찾는 사람들은 집단의식이나 진영의 이익이나 감성을 앞세우느라 논리를 파괴한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냉철하고 희생적인 지성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논리 가운데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쓰던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북한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도 이론도 아니다. 그저 운동 구호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보편성이나 객관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을 대할 때만 선택적으로 쓰고,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내재적 접근법이 아니라 '인권' '민주' 등 보편적 잣대를 적용하였다. 소위 학자들도 이것을 '논리'라고 사용하면서 대한민국을 논하였다. 이런 '거짓 논리'를 사용하던 진영이 여전히 국가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논리를 파괴하면서 법도 파괴한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 아직 근대적 관념을 따라잡지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통령마저도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국가는 감성의 지배를 배격하고 법(法)의 지배를 요구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법’보다 ‘말씀’이나 ‘진영’을 더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근대가 아닌 중세로 회귀하는 기괴한 상황이다. 사진은 ①1945년 8월 해방 직후 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 ②6·25 전쟁 때의 우리들의 자화상 ③6·25 전쟁 때 전사한 국군 유해를 합동 봉안하는 장면 ④전쟁으로 헤어졌던 이산가족이 상봉 행사에서 다시 만나는 모습.

지식인, 소위 많이 배운 사람들은 감성을 소비하기보다는 논리를 수호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한다. 감성보다는 논리가 제도나 국가에는 훨씬 큰 이익을 제공한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때로 위험에 처하고 비난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논리를 지킴으로써 공동체의 이익을 증가시킨다는 자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논리를 지키는 일이나 법을 지키는 일은 동전의 양면이다. 만약 지식인이면서 논리나 법을 수호하는 대신 진영의 집단의식을 지키는 데 빠진다면, 이는 헛배운 것이 분명하다. 공동체에 끼칠 해악도 크다.

최순실 딸과 조국 딸, 논리적 차이 없어

지금 우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논리 파괴다. 논리 대신 진영 결집이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조국 부부가 교육자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일이 정말 없었는가. 크든 작든 말이다. 최순실의 딸과 조국의 딸 사이에 논리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감성적으로만 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병우와 조국 사이에도 논리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진영의 감성으로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성숙한 사회는 논리를 지키지 감성을 지키지 않는다. 이것을 '인디언 기우제'나 '태산명동서일필' 같은 말로 무력화하려 드는 태도는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진영의 강박증이 표현된 것일 뿐이다. 전혀 지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조국을 지키는 일과 검찰을 개혁하는 일 사이에 원래는 아무 관련도 없다.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일치시키는 논리는 '내재적 접근법'만큼이나 비논리적이다. 논리를 지키는 지적 성숙보다는 진영을 지키는 감성의 결집이 더 강하기 때문에 빚어진 중세적 사건이다. 검찰 개혁은 이미 법을 무력화하는 권력투쟁으로 전락했다. 이번 검찰 인사는 누가 봐도 수사를 저지하기 위하여 권력을 임의적으로 행사한 것이다. 진영의 감성으로는 공정한 인사라고 하면서 눈을 감겠지만, '논리'라는 놈은 그것을 안다. 진영을 지키기 위하여 헌법을 무력화한 사건이다. 한 단계 상승한 더 나은 나라를 꿈꾼다면, 즉 혁명을 원했다면, 우선 진영의 감성을 벗고 국가적 단계의 논리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아직 잘 훈련되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