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년 전 얘기가 갓 피어난 풀꽃처럼 생생하다. 12일 개봉하는 '작은 아씨들'(감독 그레타 거위그)은 오래된 가치와 새로운 시대정신을 절묘하게 엮어낸 역작이다. 원작은 1868년 미국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펴낸 동명 소설.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됐고 10대의 대표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이다. 그동안 7차례나 영화로 나왔다.

여자는 누구나 결혼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1860년대. 작가를 꿈꾸는 조는 그래도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운 건 지금 우리 모습이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8번째로 나온 그레타 거위그의 '작은 아씨들'은 그중 대담하며 힘이 넘친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미국 매사추세츠주(州)의 콩코드에서 자라는 네 자매 메그·조·베스·에이미의 얘기를 그렸지만, 이들 모습이 뜻밖에도 2020년을 사는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새롭지만 거칠지 않고, 미국의 오랜 정신인 청교도적 가치를 따스하게 비추지만 그럼에도 파릇파릇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다. 올해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받았고, 오는 9일(현지 시각)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각색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여성, 그 입체적인 주체

소설 '작은 아씨들'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가 꿈 많은 네 자매의 유년 시절을 그린다면 2부는 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겪는 삭막한 현실을 다룬다. 그레타 거위그 감독은 이 소설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쪼개 다시 헤쳐 모았다. 퀼트를 깁듯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네 자매의 각기 다른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메그(에마 왓슨), 작가가 되고 싶은 조(시어셔 로넌), 음악가를 꿈꿨던 베스(엘리자 스캔런), 화가로 성장하길 원했던 에이미(플로렌스 퓨)까지. 각자 꿈은 다르지만 네 자매는 모두 돈이 절실하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가족을 떠날 수 없으며, 이 혼돈의 세상을 남성과 어울리며 살고도 싶어한다. 영화 속 조가 "여자에게도 마음과 영혼이 있어! 야망도 있고 재능도, 아름다움도 있어. 여자에게 필요한 게 사랑뿐이라고 말하는 건 지긋지긋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레타 거위그 감독은 이들 모습을 수채화처럼 비추면서 여성의 욕망이 결코 단선적인 것이 아님을 재치있고 유쾌하게 일깨운다. 신문사 편집자인 미스터 대시우드가 "여자 주인공이 싱글로 사는 소설은 아무도 안 읽어요! 결혼을 시키세요, 죽이거나!"라고 외치는 장면이 대표적. 여성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 순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어셔 로넌은 영화 속 날카로운 질문을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영민하게 담아낼 줄 아는 배우다. 그가 흥분과 설렘으로 얼굴을 빛낼 땐 보는 이의 맥박도 빨라지고, 그가 낙담할 땐 보는 이도 벽에 부딪힌다. 마치가(家)의 어머니를 연기한 로라 던도 주목할 만하다. 위풍당당한 여성을 주로 그려온 그는 이제 1860년대의 부드러운 어머니 얼굴로 여성의 힘과 능력을 그릴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고모를 연기한 메릴 스트리프는 몇 장면만으로도 영화의 호흡과 리듬을 바꾼다. 그가 찡그릴 땐 모두 웃고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땐 모두 감탄한다.

복잡한 세상을 끌어안는 손

눈을 현혹하는 갖가지 의상과 완벽한 미술 세트를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 티모테 샬라메(로리)·루이 가렐(베어 교수) 같은 꽃미남 배우의 연기도 빼어나다.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전통적 가치와 교직한 것도 칭찬할 만하다. 가난해도 자존심을 잃지 않는 것, 가족이 절망 속에서도 함께 껴안고 일어서는 것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거위그 감독은 "여성은 복잡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