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풍경이 이토록 마술적이고 초현실적일 수도 있다. 5일 개봉하는 '조조 래빗'(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은 시대의 비극을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그린다. '기생충'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놓고 겨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9일(현지 시각)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각색상 등을 포함해 여섯 부문 후보에 올랐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의 독일. 주인공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열 살짜리 소년으로, 히틀러 유겐트 단원이 돼 전쟁 영웅이 되길 꿈꾼다. 그의 곁엔 상상 속의 히틀러가 늘 함께 있다. 조조는 히틀러와 함께 걷고 말하고 밥 먹지만, 정작 그는 매사 나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비웃음을 산다. 조조는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여자아이 하나가 숨어 지내고 있음을 알고 적잖이 당황한다.

히틀러를 숭배하는 열 살짜리 소년 조조(오른쪽)는 하루종일 상상 속 히틀러(왼쪽)와 함께 뛰고 걷고 숨쉬며 지낸다. 이런 조조의 삶에 예기치 않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반어(反語)는 직설어법보다 날카롭다. 조조는 귀여운 얼굴로 의심 없이 "유태인은 뿔이 달렸다"고 한다. 상상 속 히틀러는 조조에게 다락방에 숨은 소녀를 놓고 "물건"이라고 칭한다. "다락방 물건이 네 인생을 망치게 두면 안 돼. 네가 이용해야지." 주인공들은 악의가 없어 보이고, 모든 장면에선 웃음기가 넘친다. 이를 통해 영화가 세상을 뒤덮었던 광기의 실체를 서서히 드러낼 때 보는 이는 전율한다. 시대를 장악한 이념이 때론 어처구니없는 것일 수 있음을, 사람들이 의심 없이 대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난센스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조조 래빗'은 천진하게 고발한다.

'조조'를 연기한 13살 아역배우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둥근뺨,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영화 속 비극을 잊게 하는 또다른 힘이다.

주인공 조조를 연기한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조조 래빗'의 뼈대이자 얼굴이다. 1000대1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통과해 난생처음 연기했다는 13세 소년은 태어난 순간부터 영화인이었다. 아빠는 촬영감독 벤 데이비스, 엄마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카밀 그리핀. 할아버지 역시 촬영 감독 마이크 데이비스다. 화상 통화로 본 오디션에서 감독의 질문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탓에 데이비스는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다"고 했다. 그의 엄마가 "네 머리 모양이 감독님과 똑같아서 붙여준 것 같다"고 농담했을 정도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그러나 이런 데이비스를 두고 "13세인데도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감정선을 잡아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놀라운 배우"라고 했다. 데이비스의 입술과 둥근 볼은 그 자체로 언어다. 아이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갈 땐 보는 이도 미소 짓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땐 보는 이도 한탄을 삼킨다. 이 영화로 데이비스는 북미방송영화비평가협회가 주관하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에서 아역배우상을, '피닉스 영화비평가협회'가 주는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데이비스에게 연기 지시를 하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 두 사람은 친구랑 뛰어놀듯 함께 상상 속 히틀러와 조조를 연기했다고 했다.

조조의 어머니 로지를 연기한 스칼릿 조핸슨은 짧은 등장만으로도 마술적인 매혹을 증폭시킨다. 그는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결혼 이야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한꺼번에 올랐다. '토르:라그나로크'를 연출했던 와이티티 감독은 '조조 래빗'의 메가폰을 잡는 동시에 상상 속 히틀러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