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월 초순 어느 날 경성 견지동 조선일보사에 국내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홍명희·이갑성·한기악 등은 모임에서 일제에 맞서 민족의 역량을 모으는 협동전선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국내외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해 동의를 받는 한편 창립 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1월 19일 '1. 조선민족으로서 정치·경제의 구경적(究竟的) 해결을 도모한다. 2.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내건 신간회(新幹會)를 발기했다.

1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강령과 발기인 명단을 단독 보도했다. 또 '신간회의 창립 준비: 진지한 노력을 요함'이라는 사설을 실어 철저한 준비와 성공을 주문했다.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2월 16일 자 조선일보는 "시작 전부터 조수(潮水)같이 밀려들어 방청석은 정각이 되기 약 한 시간 전부터 입추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했다.

신간회 창립대회 상황과 결과를 보도한 1927년 2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오른쪽)와 2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창립대회장 모습 사진. 창립대회에 1000여명이 참가했고,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고 보도했다.

일제 시기 최대 항일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출범은 조선일보가 주도했다. 창립 발기인 및 간부 51명 가운데 조선일보계가 9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장 이상재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고, 부사장 신석우는 창립 실무를 총괄했다. 7개 활동 부서의 책임자 중 4명(정치문화 신석우, 조사연구 안재홍, 출판 최선익, 선전 이승복)이 조선일보 간부였다. 또 '단일민족진영' '신간회창립 종(終)' '전민족적 단일당(單一黨)의 조직과 임무에 대하여' 등 10여 편의 사설과 논설을 통해 신간회의 사명과 방향을 제시했다.

민족운동의 통일적 지도 기관을 자임한 신간회는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각지의 사회·청년·사상·농민 단체들이 신간회에 동참했다. 전국에 140여 지회가 만들어졌고, 약 4만명에 이르는 정예 회원이 확보됐다.

조선일보는 전국 각지의 신간회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신간회 지회·분회는 조선일보 지사·지국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일보는 지면에 '신간회 기사 일속(一束)' '신간회 각지 소식' 등 고정란을 두고 신간회 지회·분회의 설립과 크고 작은 활동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중요한 사안은 사설·논설로 뒷받침했다.

조선일보는 신간회와 손잡고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억압하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등 6개 악법(惡法)의 철폐 운동을 전개했다. 또 색의단발(色衣短髮), 건강 증진, 상식 보급, 소비 절약, 허례(虛禮) 폐지 등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생활개신운동도 신간회와 함께 펼친 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신간회와 힘을 합쳐 진상을 밝히고 우리 학생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당시 조선일보 논설반원으로 신간회 중앙위원이었던 이관구는 훗날 "신간회 운동에 대한 조선일보의 적극 지원은 우리나라 최초 '프레스 캠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신간회를 뒷받침한 '조선일보 트로이카']

조선일보의 신간회 운동 지원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트로이카'의 역할이 컸다.

(왼쪽부터)안재홍, 한기악, 이승복

1924년 9월 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할 때 초빙된 주필 안재홍은 신간회의 최고 이론가였다. 그는 조선일보에 재직하는 8년 동안 사설과 시평 등 1450편의 글을 썼고 웅장하고 선명한 명논설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1927년 초 편집국장과 영업국장으로 조선일보에 합류한 한기악과 이승복은 신간회 창립과 활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한기악은 만주·시베리아·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됐다. 1920년 4월 귀국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온 그는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선비형으로 신간회 활동을 지면에 담는 사령관이었다. 이승복은 시베리아와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귀국 후인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언론계의 제갈공명'으로 불린 그는 신간회의 조직에도 뛰어난 역량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