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찬 실리콘밸리 특파원

미국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차에 짐을 두고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차 좀도둑 때문이다. 차 안에 물건이 보이면 십중팔구 망치로 창문을 깨고 가져간다. 트렁크에 숨겨놔도 안심하지 못한다. '이러고도 선진국인가' 싶을 정도다. 오래된 문제인데 여전히 그대로다.

실리콘밸리도 차 좀도둑 많기로 유명하다. 관광 명소인 샌프란시스코가 속해 있는 데다 구글·애플·페이스북 같은 테크 기업 본사가 위치한 부자 동네이다 보니 좀도둑에게도 천국이다. 캘리포니아주에서만 매년 24만여건의 차 좀도둑 신고가 들어온다. 동네 대형 마트나 음식점 주차장에 가보면 깨진 차 유리창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자동차 보험 앱 첫 화면에 '차창 깨짐' 신고 메뉴가 있고, 동네마다 '차창 전문 수리점'도 성황이다. 도로에는 깨진 창문을 수리하지 못해 일단 비닐로 덮은 차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지난달 29일 찾은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명소 팰리스 오브 파인아트(Palace of Fine Arts). 100여년 전 국제엑스포를 위해 유럽 건축 양식을 본떠서 만든 대형 건축물이다. 도로변을 따라 주차된 관광객들의 차 사이로 '좀도둑 주의' 표지판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차 문 잠그고 귀중품은 숨기세요" "도둑들이 훔치는 데는 몇 초면 충분합니다"와 같은 식이다. 경찰차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차가 빈번하게 털리는 1위 지역이다. 지난 한 달 새 경찰에 신고된 것만 53건이다.

지금까지 경찰 당국의 안내 문구는 '차 문은 잠그고(lock), 차 키는 챙기고(take), 소지품은 잘 숨기라(hide)'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지침이 바뀌고 있다. 차 좀도둑들이 첨단 IT(정보기술)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잘 숨겨봐야 소용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촌스럽게 차창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대신 스마트폰의 '블루투스(무선 통신 기술) 스캐너' 앱을 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노트북 같은 전자 기기가 송출하는 신호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차 안에 훔칠 만한 게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샌타클래라시(市) 경찰은 최근 홈페이지에 '차 좀도둑 예방법'을 올렸다. "좀도둑들이 전자 기기의 블루투스 신호를 읽으니, 차에서 내릴 때는 기기를 '비행기 탑승 모드'로 바꾸거나 블루투스·와이파이(무선 인터넷) 기능을 끄고 전원도 확실히 차단하라"는 다소 복잡한 주문이다. 또 "장시간 느린 속도로 주차장을 배회하는 의심스러운 차를 보면 신고하라"는 내용도 있다. 요새 좀도둑들은 차 안에서 스캐너 앱을 여러 개 켜놓고 주차된 차 주변을 돌며 정확하게 범죄 대상을 찍는 식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새너제이의 한 대형 마트 야외 주차장에서 스마트폰에 설치한 블루투스 스캐너 앱을 켜봤다. 주차된 차 사이를 오갈 때마다 애플, 구글과 같은 전자 기기의 브랜드와 블루투스 신호 세기가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돈 될 만한 게 차 안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도둑이 자기 손바닥 보듯 차 내부를 읽고 있는 것이다. 짐을 숨겨보겠다고 주차장에서 트렁크 열고 주섬거리고 있으면, 오히려 먼발치서 지켜보는 좀도둑들의 '우선 범죄 타깃'이 된다. 그러니 무조건 다 들고 내리는 게 상책이다.

원래 블루투스 스캐너 앱은 집이나 사무실에서 분실물을 찾는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를 좀도둑들이 악용하는 것이다. 역시 기술은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실리콘밸리의 차 좀도둑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