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책과함께|564쪽|3만3000원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가 문제적 사회현상으로 언급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된장녀' '김치녀' '맘충'은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혐오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방식'이라면, 여성 혐오는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방대한 분량의 신문, 영화, 드라마, 문학작품, 광고 카피를 찾아내 시대별로 여성 혐오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했으며, 그 틀 속에 여성을 가둬왔는지 밝힌다. '여성 상위 시대'라는 표현이 대중적 주목을 받은 것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여성상위시대'가 나온 19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여자가 남성 위에 군림한 적은 영화가 나오기 이전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없었다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지난해 기준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OECD 꼴찌 수준이란 객관적 증거도 제시한다. 현실에선 여성이 상위에 군림하기는커녕 남자와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만 해도 격한 혐오 반응을 불렀다. 저자는 그 첫 증거로 여대생에 가해진 혐오의 역사를 들려준다. 1970년대까지 소수의 교육받은 계층이었던 여대생은 그 희소성만으로도 가부장 질서를 깰 잠재적 위험 요소로 취급당했다. 여대생의 가부장 질서 밖 탈출을 막기 위해 부당하고 근거 없는 환상이 만들어져 유통됐다. 그중엔 '여대생은 정숙하지 못하다'는 통념도 있다. 사치와 향락을 즐긴다는 비난도 더해졌다. 남자 대학생도 가세했다. 1971년 9월 이화여대 앞에서 열린 사치 풍조 규탄 시위가 대표적이다. 당시 남자 대학생들은 지금 같아선 상상도 못할 내용의 유인물을 여대생에게 나눠줬다. '다방과 과자점으로 향하는 그대들의 발길을 서점으로 돌려라.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여성 고등교육이 확대된 1980년대 들어 이런 공격이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되자 '청순가련한 외모를 하고 백마 탄 왕자나 찾는 속물' 이미지로 재포장해 비하했다.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을 대중에 각인시킨 1969년 영화 ‘여성상위시대’ 신문광고. ‘여성은 남성하위 시대를 창조했다’고 선전했다(왼쪽). 1971년 9월 28일 이화여대 앞에서 사치 풍조를 규탄한다며‘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으라’고 쓴 유인물을 나눠주는 남자 대학생들을 다룬 신문 기사(오른쪽).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는 '가족 내에서 여성을 어떤 자리에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체적인 혐오 양상은 '무엇이 바람직한 가족인가'라는 가족 이데올로기 변화에 맞춰 구성되길 반복했다. 경제력을 가진 남자가 가정밖에는 기댈 게 없는 여자를 일방적으로 버렸던 1960년대에 이혼녀는 불쌍한 여자로 동정을 받았을 뿐, 혐오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그들이 이혼을 선택할 수 있게 되자 '가정을 무너뜨리는 적'이 되어 혐오에 포박당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로 저자는 1990년대 말 닥친 IMF 외환 위기를 꼽는다. 성별 분업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족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던 때다. 아버지의 위상이 가부장에서 프렌디(친구 같은 아빠)로 '격하'되고, 여성이 사회에 대거 진출하는 과정에서 성 대결 양상까지 겹쳐지며 여혐이 노골화됐다고 말한다. 가사에 열심인 '트로피 남편'이 등장했으니 주부도 '능력 있는 워킹맘'이 되어야 했다.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주부도 여혐의 그물에 포획됐다. 그들이 즐기는 여가는 비난의 대상이 됐고 주부들은 김치녀, 맘충으로 지탄받았다.

직장 생활에 바빠 결혼 시기를 놓친 여성은 골드미스로 불렸는데, 화려한 명칭과 달리 '혼밥'에 지치고, 연애는 책에서나 경험하며, 정서 안정에 필요하다며 그림책을 탐닉한다는 식으로 비하한다. 골드미스들이 혐오에서 벗어나려면, 결혼한 형제자매를 대신해 노부모를 부양하라는 요구에 응하는 방식으로 가족 질서에 귀환하는 방법밖에 없다.

주류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란 점에서 여성 혐오는 우리의 치부를 그린 초상화다. 하지만 멀리 보면 성 평등 사회로 가는 상황에서 겪는 과정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내놓는다. 그러나 당장은 여성 혐오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넘어 여성 간 대립과 갈등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한다. 남자로서 반론을 펴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그러나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풍성하게 제시된 증거들 앞에서 어머니, 아내, 딸을 떠올리고 ‘공감’이란 단어를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