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SKY(스카이)가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대학이로다/ 점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갈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노력하고 SKY 못 간다 하더라."

영어 학원 전단에 적힌 글귀를 보고 쓴웃음 지었다.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가 어쩌다 학원 광고 문구로 전락했나. 가슴은 세속적 패러디에 거부반응 일으켰지만, 조급함에 잠식당한 학부모 머리는 쉽게 투항했다. 방학 특강에 아이를 욱여 넣었다.

영 마음이 찜찜한데 요즘 영어로 화제인 인물이 떠올랐다. 봉준호 감독의 통역 담당 최성재(영어명 샤론 최)씨. 디테일까지 한 올 한 올 살려내 통역하며 러닝메이트처럼 봉 감독과 함께 '아카데미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봉 감독이 지난달 8일 전미비평가협회(NBR) 외국어영화상을 받는 자리에서 영어로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I don't know how she can do this.…She really destroyed the language barrier(어떻게 이걸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진짜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렸어요)." 통역하려던 최씨가 당황했다. 신선한 탈선이었다.

최씨 통역 못지않게 영어를 대하는 봉 감독의 자세가 눈에 띄었다. 당당하고 거침없다. 주저 없이 한국말과 토종 영어를 휙휙 오간다. 미국 배급사인 '네온' 톰 퀸 대표에게 영어로 설명하다가 꼬이자 넉살 좋게 한국어로 말해 버린다. 그것도 반말로. "당신이 얘기해봐. 내가 내 입으로 말하려니 잘 모르겠어." 평생 영어 울렁증 달고 살다 대물림까지 하는 한국 사람에겐 쾌감마저 준다.

센스 넘치는 콘텐츠 앞에서 언어 장벽은 맥을 못 춘다는 것도 증명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화비평가협회(AAFCA) 외국어영화상을 받고는 대학 시절 친구들끼리 자막 단 경험을 영어로 말했다. "The movie I did subtitle was 'Jungle Fever' and 'Do The Right Thing'(내가 자막 단 영화가 '정글 피버'와 '똑바로 살아라'였어요)." 어색한 콩글리시였지만 박장대소가 터졌다. 아프리카계 미국 감독 스파이크 리의 작품을 콕 집은 게 웃음 포인트였다. 한국말로 "영어에 다양한 욕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스파이크 리 감독 덕에 공부 많이 했다"는 위트도 잊지 않았다. 할리우드 비평가협회(HCA) 각본상을 탔을 땐 "조용한 커피숍을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 개봉 때 가보면 거의 문을 닫았더라"며 망한 커피숍 주인들에게 상을 바쳤다. TPO(time· place·occasion, 시간·장소·상황) 딱딱 맞춘 화술은 언어의 허들을 뛰어넘어 할리우드 톱스타도 귀 쫑긋 세우게 했다.

이쯤 되면 영어 스킬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기생충'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자막을 극도로 싫어하는 미국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이끌었듯 대체 불가능한 내용이 있으면 아쉬운 쪽에서 언어 장벽을 걷어내고 다가온다. 통역사 지인이 말했다. "발음이 후지니 영어 하기 두렵다는 사람은 많아도 콘텐츠가 빈약해 영어 하기 겁난다는 사람은 드물다. 정작 듣는 사람은 발음보다 콘텐츠를 따지는데."

'기생충'이 세계적 붐을 일으킨 데는 역설적으로 한국어의 힘이 컸다고 본다. 전작 '설국열차' '옥자'에선 영어와 한국어가 삐걱거리며 낸 엇박자가 거슬렸지만 기생충은 모국어로 일상의 미세 주름, 모공까지 살려내 자연스럽다. 언어는 문화에 기생하고, 문화는 언어에 기생한다. 오는 9일(현지 시각) 봉 감독이 '로컬 행사'라고 뒤튼 아카데미는 '로컬 언어' 한국어를 최고봉에 세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