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범씨가 "성공한 사람이 하는 얘기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하나요?"라고 하자 강송규씨가 "성공보다는 망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받아쳤다.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강연 후 연사 다섯 명이 질문을 받고 있다. 왼쪽부터 강송규·노상범·안세준·양기엽·황성진씨.

“햇반 살 돈도 없어서 밥을 굶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햇반을 샀죠. 그날 사무실 문을 닫았어요.”(안세준)

"여러분, 햇반 얘기 들으셨죠? 주변에 망한 사람이 있다면 위로한답시고 술을 사주지 마세요. 현금을 주세요. 단돈 5만원이라도 좋습니다."(노상범)

모두가 성공을 자랑할 때 실패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9일 서울 강남의 한 강연장에서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일명 '망비보' 강연이 열렸다. IT 기반 회사를 창업했다가 접은 강연자 다섯 명이 나와서 제목 그대로 '실패하고 나서 깨달은 점'을 이야기하는 자리다. 가장 나이가 많은 강송규·노상범씨가 50대 중반, 가장 어린 양기엽씨가 20대다. 대기업에 다니는 안세준씨를 제외하고 네 사람은 또 창업했거나 할 예정이다. 강연은 크라우드 펀딩(여러 개인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통해 성사됐다. 펀딩 가입 금액은 1인당 3만3000원이었고, 50여 명이 참여했다. 펀딩이 끝난 뒤에 표를 사거나 이날 현장에서 강연 신청을 한 이들도 있었다. 최종 신청자는 60명을 넘었다.

첫 연사인 강송규씨가 "이런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는데"라며 운을 떼자 청중 속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연사들은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신용 불량자가 되거나 집행유예를 받게 된 사정을 말했다. 세 시간 동안 이어진 강연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지막 연사인 황성진씨가 여러 농담을 던지다가 웃음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이렇게 말했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에 망한 이야기 들으니까 더 힘들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연이 끝난 뒤 강송규씨는 "원래는 재밌는 이야기도 준비해왔는데, 막상 신용 불량자가 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니까 도저히 웃지를 못하겠더라. 청중도 단지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마이크 타이슨이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이들에게는 확고한 사업 계획이 있었고, 한때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강송규씨는 35세에 창업한 웹에이전시를 해외에 꽤나 큰돈에 매각했고, 노상범씨도 2000년에 해외 투자금 1200만달러를 유치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나머지 세 연사도 전공 분야에서 인정받고서 사업을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망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업할 땐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양기엽씨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창업했고, 늦더라도 완벽한 제품을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나머지 객관성을 잃었다. 내가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었어야 했고, 가능한 한 작게, 빠르게 움직였어야 했다"고 말했다.

실질적 조언도 이어졌다. 회사가 문 닫을 때 꼭 해결해야 하는 게 '세금'임을 강조했다. 금융 부채나 체불 임금을 다 해결한다고 해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파산 신청이나 사업자 등록도 할 수 없고,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없다. 황성진씨는 "정부에서 주는 상도 많이 받고, 언론에도 여러 차례 나와서 사업이 잘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망했다"며 "돈을 벌 수 있는 구조, 즉 수익 모델을 확실히 만들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다섯 명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바로 '타이밍'이다. 안세준씨는 "확장과 수익,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타이밍에 확장을 선택한 것과 투자 유치를 받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 내가 망한 이유"라고 했다.

이날 강연의 결론은 '실패하지 않는 법'이 아니라 '잘 실패하는 법'으로 수렴됐다. 안세준씨는 "대박 난 스타트업을 오죽하면 유니콘이라고 하겠냐"며 "유니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동물이란 점을 감안할 때, 성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스타트업 환경이 좋다는 미국에서도 창업 성공 확률을 1%라고 보고 있고, 이날 강연에서도 첫 사업에서 성공할 확률은 약 3%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와 성공을 따질 게 아니다. 실패에도 여러 단계가 있고,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따라 훗날 성공을 판가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진짜 망한 사람들은 여기 못 나옵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죠."(노상범)

"다시 일어설 에너지가 있을 때 쓰러져야 하는데,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다 보면 재기할 에너지마저 다 잃게 되거든요."(안세준)

강연을 주최한 온라인 매체 'ㅍㅍㅅㅅ'의 이승환 대표는 "창업한 뒤 힘들게 회사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 누구나 실패 사례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나온 강연은 많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나온 강연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많고, 그중 실패한 사람도 꽤 있어서 강연자를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실패담을 공유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강연자들은 창업해서 힘들게 회사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에게 작게나마 통찰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고 연단에 섰습니다."

이날 강연을 들으러 온 회사원 이모(40대)씨는 "실패담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하다"며 "응급약과 보약을 한 번에 먹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정모(28)씨는 "좋은 아이템을 갖고서 열심히 일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창업에 실패해서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냐고 묻자 정씨는 고개를 저었다. "망해도 다들 살아남았고, 지금도 무언가를 하고 있잖아요. 꼭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최악의 경우 죽기야 하겠어요?"

선진국일수록 실패 강연 흥행

20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페일콘'(failcon·실패를 뜻하는 'fail'과 강연을 뜻하는 'conference'의 'con'에서 딴 이름)이 처음 열린 이래로 이 강연은 실리콘밸리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주로 기업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실패에서 배운 내용을 나눈다.

핀란드는 2010년부터 10월 13일을 ‘실패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 창업자들이 나와 실패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실패를 축하해 주는 행사가 열린다. 핀란드 국민의 4분의 1이 지켜본다. 핀란드를 대표했던 기업 노키아가 하락세에 접어들자 스타트업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걸림돌이었다. 핀란드 알토대학교의 알토이에스란 창업 동아리가 두려움을 없애고 실패의 긍정적인 효과를 알리는 행사를 연 것이 ‘실패의 날’ 시작이다. 2011년 ‘실패의 날’ 행사에는 요르마 울릴라 노키아 명예회장이 참가해 자신의 실패 경험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