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한겨울임에도 긴팔 셔츠 하나만 걸친 초라한 행색의 노인(74)이 서울 동대문구청·보건소 앞마당에 들어섰다. 눈은 충혈됐고, 콜록콜록 기침을 끊임없이 해댔다. 기자가 "우한 폐렴 때문에 오셨느냐"고 묻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라고 했다. 이 보건소는 정부가 우한 폐렴 의심 환자 검사를 목적으로 지정한 '선별진료소'가 운영되는 곳이다. 정부 지침에 따르면, 선별진료소는 입구에서 직원이 의심 환자들에게 발열 검사를 하고, 마스크를 착용시킨 뒤 안내하게 돼 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기자가 노인을 보건소 건물 한쪽에 별도 외부 출입문을 가진 선별진료소로 안내했다. 노인은 문을 슬쩍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사실은 우한 폐렴이 아니라 노인 폐렴 때문에 왔다"며 발길을 돌려 보건소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 말이 달라졌느냐"는 물음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우한 폐렴 확진자로 밝혀진다면, 구청과 보건소는 폐쇄되고 그와 접촉한 직원·방문자를 찾기 위한 대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안내 직원 없이 천막만 덩그러니 - 29일 서울 성동구보건소 주차장에 설치된 우한 폐렴 의심 환자 진료 대기실(왼쪽 사진)이 안내 직원 없이 방치돼 있다. 지침상 직원이 머물며 방문 환자를 관리해야 하는 곳이다. 같은 날 서울 동대문구보건소 진료대기실(오른쪽 사진)은 직원이 없는 데다 사방이 개방돼 '격리' 효과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정부는 28일 전국 대형 병원과 군·구 보건소 등 전국 288곳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우한 폐렴) 선별진료소'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선별진료소는 1339번으로 전화를 걸어 "우한 폐렴과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 문의하면 안내받는 장소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한 폐렴에) '과잉 대응'이라고 할 정도로 대처하라"고 큰소리도 쳤다. 그러나 본지가 돌아본 전국 선별진료소 현장은 정부 발표나 지침과는 차이가 컸다. 정문 입구는 대부분 직원 없이 방치됐고, 기침 환자가 격리 조치 없이 일반인과 뒤섞여 돌아다니는 곳도 많았다.

엄중식 가천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선별진료소는 평시에 가짜 환자를 대상으로 동선과 진료 상황을 시뮬레이션·연습해 봐야 제대로 운영이 된다"며 "지역별로 전문가들에게 진료소 관리 자문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29일 정오 무렵 서울 서초구보건소 우한 폐렴 선별진료소에서는 20대 남자가 직원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남자는 "기침이 많은데 왜 검사를 안 해준다는 겁니까" "최근 중국에 다녀왔다니까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직원은 차분하게 "지침상 중국에 다녀왔어도 고열 증세가 없으면 검사 대상이 아니에요"라고 맞섰다. 사실 직원 말은 틀렸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중국을 다녀온 사람이 발열 또는 기침을 호소하면 검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자는 5분간 직원의 냉대를 받은 끝에 "차라리 중국에서 검사받는 게 낫겠다"며 포기하고 돌아갔다. 국내 4호 우한 폐렴 확진자도 병원에서 이 남자처럼 '열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귀가 조치됐고, 이후 172명과 접촉했다.

선별진료소는 우한 폐렴 의심 환자가 가는 1차 검증기관이다. 본지는 이 가운데 19곳을 28·29일 돌아봤다.

입구부터 방역(防疫) 구멍이 눈에 띄었다. 질병관리본부가 28일 발표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의료기관 안내사항'에는 '안내문을 의료기관 입구에 게시해 의심 환자가 마스크 착용 후 의료기관 선별구역에서 대기하도록' 조치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날 서울 성북구보건소 입구엔 안내문이 없었다. 1층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위치를 묻자 "아마 3층으로 가야 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층 복도 한쪽 구석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선별진료실'이라는 종이가 붙은 공간이 있었다. 29일 부산 연제구보건소에는 안내문이 없었고, 울산 북구보건소에서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방문자는 안내문을 볼 수 없었다.

'의료관련감염 표준예방지침' 등 정부 지침에 따르면 감염병 진료소는 입구에서 방문자를 상대로 발열 여부를 검사한 뒤, 손 세척과 마스크 착용을 안내해야 한다. 하지만 19곳 가운데 16곳엔 입구에 직원이 없었다. 4곳은 아예 손세정제와 마스크를 갖다놓지도 않았다.

진료소 내부에서도 허점은 속속 발견됐다. 지침상 진료소에 들어온 의심 환자는 검사를 받을 때까지 별도 분리된 공간에서 대기하도록 조치돼야 한다. 서울 동대문구보건소는 1.5평(4.9㎡)짜리 천막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진료대기실'이라고 적어놨지만, 천막은 사방이 뻥 뚫려 있었다. 경기 구리보건소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직원이 여럿 보였다.

검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9일 서울 서대문구보건소를 찾은 한 여성은 보건소 건물 내부 직원에게 "감기 기운이 있다"며 검사를 요청했다. 직원은 "중국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일반 내과로 가라"고 했다. 2차 감염 가능성을 무시한 것으로, 이 역시 지침 위반이다.

정부 발표에만 존재하는 '유령진료소'도 있었다. 근로복지공단 대전병원에는 선별진료소가 아예 없었다. 대신 '진료소 예정지'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병원 관계자는 "30일쯤 돼야 진료가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전남 함평성심병원 역시 발표 하루가 지난 29일까지 건물 앞마당에서 선별진료소를 위한 간이 텐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1차 검증 기관인 선별진료소에 대한 관리가 더 엄격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갑 한림대 감염내과 교수는 "선별진료소에서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감염원 자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며 "인력이 부족하다면 상급기관인 구청에 요청하는 등 조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 내 우한 폐렴 환자 수는 발생 약 1개월 만에 2002~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감염자 수를 넘어섰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29일 오후 7시(한국 시각) 현재 우한 폐렴 확진 환자는 6086명, 사망자는 전날 대비 26명이 증가한 132명이었다. 의심 환자도 1만명에 육박한다. 사스 발생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5327명이 감염돼 349명이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