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림 2019 차범석희곡상 수상자

'싫은 것엔 오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좋은 것엔 딱히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있다. 반박하기 힘든 대명제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건 얼마나 부질없고 힘든 일인가. 그런데 누군가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좋은 감정이 들었다면 왜 좋은지 찬찬히 생각해보라. 그 안에 숨겨진 다양한 갈래의 '나'를 읽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싫은 건 패턴화가 잘 되지만 좋은 건 수만 가지 이유들로 좋기 때문에.

처음 시작은 오늘 만난 사람을 적는 일에서 시작했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지만 얼굴을 자주 잊어버리는 터라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적기 시작했다. 싫은 건 여러 가지 이유들로 적기 싫었고, 좋은 건 웬만하면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이유로 적었다. 그때 인상착의나 나와 관계한 짧은 장면들, 그리고 대화나 순간들을 기록해 보면서 점점 어떤 것들에 내가 좋다는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인상착의나 외형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른 매우 가변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사람을 이루는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가장 변하기 힘든 것은 '말투'라는 걸 확연히 느낀다. 고유의 말투나 제스처, 그것에 대한 나의 인상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은 그 사람 본연의 역사와 깊이를 즉각 드러내는 수단이니 말이다.

상대방에게서 받은 인상들을 떠올리며 왜 그게 좋았는지 감정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그 끝엔 언제나 나의 문제들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필요한 것이었거나, 나를 반추하게 된 무엇 때문에 '좋다'라는 감정이 생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싫다는 감정들로 나를 설명하기보다는 좋다는 감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의 목적은 어떤 '대상'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하던데 그중의 제일은 상대를 통해서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 아닐까. 새해에는 긍정적인 에너지 안에서 나를 찾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