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의 조화가 숨어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글씨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근원 김용준은 이렇게 감탄했다. 우리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아니었나 보다. 지난여름, 추사가 1809년 연행(燕行)으로 중국 땅을 밟은 지 210년 만에 추사 작품 117점이 처음 중국에서 공개되자 현지 반응이 뜨거웠다. 하루 평균 5000명, 두 달간 관람객 30만명이 다녀갔다. 우웨이산(吳爲山) 중국국가미술관장은 "글씨를 넘어선 그림이다. 심미적으로나 조형적으로 현대 추상과 직통한다"고 했고, 서예가 황진핑(黃金平)은 "병풍 한 폭, 글자 한 자마다 고풍스러움과 소박함, 균형을 깬 듯하면서 다시 화합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글로벌 추사'로 거듭나게 한 베이징 특별전이 금의환향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18일 개막한 '추사 김정희와 청조(淸朝) 문인의 대화'는 지난해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열린 동명(同名) 전시의 귀국전이다. 추사의 현판·대련·두루마리·병풍·서첩 등 대표작과 함께 추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작품까지 120여점을 선보인다.

추사의 ‘유희삼매’. 천진하고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조각가 김종영이 소장했던 ‘완당집고첩’에 수록된 글씨다. 18×414㎝.

'계산무진(谿山無盡·계산은 끝이 없구나)'과 '유희삼매(遊戱三昧·예술이 극진한 경지에 이름)'는 글자 배치부터 파격적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다가 뚝 떨어지는 리듬, 비우고 채우는 공간 경영이 돋보인다. 스물셋에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가서 최신 학문에 눈을 뜬 추사는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유하며 역대 서법을 익혔고, 귀국 후 평생 이를 갈고닦아 추사체라는 독보적 서체를 완성했다. 추사 스스로 밝혔듯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산물이 바로 추사체다.

베이징 전시가 추사와 중국 석학들의 교류를 통해 '필묵공동체' 동아시아를 강조했다면, 이번 전시는 추사 글씨의 현대성에 방점을 찍었다. 전시장 말미에 김종영, 윤형근 등 추사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작가들의 조각·회화를 함께 전시했다. 한국 현대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은 추사의 '유희삼매'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큐레이터는 "김종영은 추사의 유희를 '모든 구속을 벗어난 절대자유'로 해석했다"며 "글자와 획을 해체해 재구성하고 공간을 처리한 파격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3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