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커피와 과일이 있는 정물화, 1888년, 캔버스에 유채, 65×81cm, 개인 소장.

커피는 음료가 아니다. 직장인에게는 사무용품, 학생에게는 학용품이다. 없으면 도무지 일이 안되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에게 커피는 화구(畵具)였던 게 틀림없다. 카페는 물론이고 커피도 그의 초상화와 풍경화, 정물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중 테이블 한가운데에 드립식 커피포트를 둔 이 정물화는 1888년 반 고흐가 남프랑스 아를에 머물던 시기에 그렸다. 그림 오른쪽의 흰 커피잔과 꽃 그림이 있는 큰 주전자가 반 고흐의 다른 정물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그가 가까이 두고 쓰던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이 없는 반 고흐는 인상주의에서 출발하여 각자 개성적 화풍으로 나아가던 화가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를 만나 밝은 색채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전까지 어둡고 칙칙하기만 했던 반 고흐의 그림은 순식간에 이토록 눈이 시리게 밝은 원색의 대잔치로 변모했다. 특히 그는 이즈음에 보색 대비, 즉 보색 관계인 두 색을 나란히 놓으면 서로 영향을 미쳐 각각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현상에 매료되면서 그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대표적이다. 반 고흐는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리기에 앞서 스케치를 하고 각 면에 색깔을 일일이 글로 적어서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다. 사진이라는 새 문물이 빛을 보기 이전에 먼 곳의 동료와 그림을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어울려 쨍하게 맑은 기운을 내뿜는 이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과연 그는 커피를 마신 다음 그림을 그렸을지, 아니면 그림을 완성한 다음에 느긋하게 커피를 즐겼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