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얼어붙어 있다. '탕' 하고 울린 총성도, 그 순간 피를 쏟는 대통령도, 저격자의 얼굴에 흐르는 땀도, 놀라 흩어지는 밴드와 가수도…. 22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우리를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의 방으로 끌어들인다. 감독은 그 방 안으로 우리가 저벅저벅 걸어들어가도록 만든다. 역사를 바꿔놓은 그 순간의 비밀, '대체 저격자는 왜 총을 쐈을까'를 묻기 위해서다.

'남산의 부장들'은 정교하고 빽빽한 장르 영화다. 특히 궁정동 안가에서 총구에 불이 붙는 이후의 시간은 숨을 몰아쉴 틈조차 없이 흘러간다. 주인공의 땀구멍까지 비추는 극한의 클로즈업과 빠른 편집으로 불이 붙듯 속도감 있게 관객을 끌고 간다. 김규평이 총을 쏘기까지,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을 만나고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과 대립하는 40일간의 행적을 담았다. 10·26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만큼 '픽션'보단 '논픽션'에 가깝다.

‘남산의 부장들’은 10·26 사태를 다시 비춘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은 캐릭터의 밑바탕 인물인 김재규의 실제 말투와 몸짓은 물론, 머리를 자주 쓸어넘기고 사탕을 종종 먹었다는 사소한 습관까지 참고해 캐릭터를 구축했다.

'내부자들' '마약왕'을 만든 우민호 감독이 만들었다. 우 감독의 기존 영화는 과하게 흥분하는 쪽이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그보단 냉정한 편이다. 감독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의 저널리즘적인 태도를 존중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통령도 김규평도 박용각도 객관적으로 차갑게 묘사한다. 그렇다고 탈정치적이진 않다. 박정희와 김재규를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정치적인 데다, 감독 역시 이를 부정하진 않는다. 영화 말미에 김재규가 재판장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 자료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대표적. 김재규를 미화한 것 아니냐는 논쟁적 질문을 피해가기도 쉽진 않아 보인다.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결국 김재규 내면의 심리와 고뇌에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렇게 객관과 주관 사이, 묘사와 분석 사이를 오가며 관객과 밀당(밀고 당기기)을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누군가는 흥미를, 또 다른 이는 피로 혹은 실망감을 느낀다.

역사적 사건을 비췄지만, 권력 투쟁에 뛰어든 남성들에 대한 우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직의 논리와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려본 남자라면 이 영화에 어느 정도 마음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우 감독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여성 캐릭터는 거의 볼 수가 없다. 권력의 그림자를 비판하려다 결국 권력에 취한 남성, 마초(남성 우월주의자)들의 시선이 비치기도 한다. 2020년 새해에 보는 영화치고는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큰 반전이 없어 지루할 수 있는 영화를 견인하는 건 좋은 배우들이다. 이병헌을 상대할 배우는 이제 이병헌뿐인 듯하다. 그는 영화에서 눈 깜박임과 숨소리 하나까지 저울로 재듯 예민하게 움직인다. 그는 "숨소리 하나라도 거칠어지면 인물의 감정을 왜곡할까 봐 두려웠다. 손가락 까닥이는 것까지 신경 썼다"고 했다. 배역을 위해 25㎏을 찌웠다는 이희준, 억양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 다른 감정을 그리는 곽도원, 박정희 대통령과 그다지 닮지 않았음에도 표정과 걸음걸이까지 박 대통령처럼 보이는 이성민 모습도 감탄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