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넘게 타오르는 호주의 화마(火魔)가 2020시즌 첫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 오픈까지 덮쳤다.

그동안 대회 명성을 드높였던 호주 멜버른의 쾌적한 공기와 푸른 하늘은 최근 온 도시가 연탄 공장이 된 것처럼 희뿌옇고 텁텁한 공기로 덮였다. 멜버른의 대기 오염 지수(AQI)는 500대 후반까지 올라갔다. AQI 지수가 300을 넘기면 '긴급 상황'으로 건강한 사람도 폐를 다친다. 야외에서 숨차게 뛰어야 하는 테니스 선수들에겐 최악의 조건이다.

호주 오픈 예선전은 14일(현지 시각) 시작했지만 선수들이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하며 기권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호주 오픈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오르면 1회전에서 바로 탈락해도 9만호주달러(약 7000만원)를 받지만, 선수들은 "도저히 뛸 수 없다. 돈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는 싫다"는 입장이다.

희뿌옇고 텁텁한 공기로 덮인 멜버른 - 15일 호주 멜버른의 호주 테니스 센터와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가 산불 사태로 인해 희뿌연 공기로 덮여 있다.

여자 단식의 달리야 야쿠포비치(슬로베니아)는 예선 1차전 첫 세트를 먼저 따고도 2세트 들어 코트에 무릎 꿇고 폐 통증을 호소하다가 기권했다. 야쿠포비치는 "계속 뛰다가는 호흡 곤란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며 "출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벌금을 물까 봐 억지로 뛰었다. 선수들을 이런 환경에 내모는 조직위원회 행태는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경기 시작 시간도 2~3시간씩 늦어지고 있다.

호주 오픈 남자 단식 본선에 직행한 권순우(23·세계 83위)도 비상이다. 권순우를 지도하는 임규태 코치는 "호흡할 때마다 불 냄새가 느껴지고, 경기장 건너편 건물이 잘 안 보인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본선은 20일(한국 시각)부터 열린다. 조직위 측은 "대기 질 상태가 더 나빠지면 경기 중단을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2018년 이 대회 준결승까지 올랐던 정현은 손바닥 건염을 이유로 출전을 포기했다.

호주 오픈 전초전 격인 대회들도 줄줄이 파행이다. 남반구 호주는 1~2월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이 기간에만 국제 테니스 대회 14개가 열릴 예정이었다. 구연우(17)는 호주 오픈 여자 주니어 단식에 참가하기에 앞서 멜버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트랄라곤 대회에서 컨디션을 점검할 계획이었지만, 대회 개막이 연기됐다. 인근에서 열리던 벤디고 챌린저대회도 진행을 중단했다. 호주 정부는 15일 멜버른 공항 활주로 한 개를 폐쇄했다.

호주에 스프링캠프를 차릴 예정이었던 국내 프로야구 구단들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두산은 멜버른, LG는 블랙타운, 롯데는 애들레이드에서 이달 말부터 스프링캠프를 연다. 3개 구단 관계자들은 "현재까지 캠프 예정 지역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면서도 "향후 상황을 예의 주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