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국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뿌리에 진영 논리가 존재한다. 진절머리 나는 정치 싸움, 공공 정책 파행, 사분오열된 시민사회, 괴담·증오·인격 살해의 장으로 변질된 온라인 공간 등 우리가 목도하는 모든 갈등과 반목의 한복판에 진영 논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국익·공동체·공정성·합리성·신뢰·관용·미래가 아니라 사익·파당·편향성·격정·불신·보복·과거를 앞세우는 뒤틀린 집단사고다.

진영 논리는 지난 한 해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를 갈가리 찢었다. 2020년 한 해도 진영 논리는 정치는 물론 외교·안보, 경제, 민생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해법이 있긴 한가.

이런 우울한 상념으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은 필자의 눈에 우연하게 한 신년특집 TV 프로그램이 들어왔다. JTBC의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였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나와 진보 진영의 동지였던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그 한 장면이다(축약). "정경심 교수의 연구실 PC 반출이 증거 보존이라니. 검찰이 압수물 증거를 왜곡할 수 있다는 상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검찰 증거물을 뜯을 때 변호인이 입회한다. 그렇게 안 하면 증거로 못 쓴다." "이 음모론 내지 피해망상을 대중은 사실로 믿는다. 스탈린, 히틀러식의 전체주의 대중 선동이다."

표창장 위조를 둘러싼 설전도 있었다. "레거시 미디어의 보도가 옳고 뉴스공장이나 PD수첩 등이 왜곡·날조였다(진중권)." "어떻게 그토록 확신하는가(정준희)?" "표창장에 기재된 프로그램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은 프로그램이 어떻게 봉사활동에 있고, 하지도 않은 봉사활동이 어떻게 표창장에 있나(진중권)?" 진중권 전 교수는 차가운 분노로 진영 논리에 맞서고 있었다. 그의 칼은 형사사건 수사 절차, 그리고 그가 최근까지 몸담았던 동양대 학사 운영의 객관적 '팩트'였다.

팩트와 진영 논리의 이 같은 대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싸움의 승자는 번번이 후자였다. 2000년대 이후 필자가 겪어온 사태들이 그러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가결 후 거센 여론의 역풍이 일자 지상파 방송의 공정성을 둘러싸고 진영들이 격돌했다. 한국언론학회는 전문 연구진을 구성해 96시간 분량의 방송물을 분석했고 보도, 자막·인터뷰·배경화면, 프레임, 사회·출연자의 표현에 편향성이 실재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진영화된 학자들·방송사·시민단체들이 이 팩트를 공격했고 결과의 채택은 무산되었다.

2009~2010년 미디어법 개정을 두고 또 진영과 진영이 맞붙었다. 개정 반대 진영은 신문·방송 겸영 확대가 여론 독과점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했고 찬성 진영은 지상파 방송의 여론 독과점을 완화한다고 맞섰다. 죽기살기식 싸움 앞에 필자 등 전문 연구자들이 제시한 팩트는 무력했고 정치권을 넘어 온 사회가 둘로 갈라졌다. 2016~2017년 가짜뉴스가 뜨거운 사회적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복수의 언론사가 정치인의 발언을 교차 검증하는 'SNU 팩트체크'가 출범했다. 정치 진영발 가짜뉴스에 팩트로 맞서려는 시도였다. 이번엔 야당 진영이 공격에 나섰다. 언론조정신청, 국정감사 자료제출 요구, 교육부 감사, 민형사 소송이 줄을 이었다. 2017~2018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KBS, MBC 등 공영방송사 수장이 친정부 인사로 전격 교체되고 현 정부 지지를 공공연히 표명한 인사들이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대거 진출했다. 그에 따른 공정성 약화를 필자는 실증적으로 검증했다. 이 연구의 팩트에 대해 진영화된 미디어 비평지들이 앞장선 공격이 쏟아졌다.

2020년 1월 문재인 정부는 현 정권 수사를 진행해온 윤석열 검찰총장 휘하 검찰 간부를 전원 좌천시켰다. 윤 총장 징계, 직접수사 부서 대폭 축소, 총장 직속 수사팀 설치 차단 등의 조치가 추가될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임명한 윤 총장이 진영을 넘어 팩트에 기초한 '성역 없는 수사'를 실행하자 취해진 보복 조치다. 이것이 입만 열면 민주·정의·공정을 외치던 이 권력 진영의 엄연한 수준이다.

우리 사회의 진영은 이처럼 공고하고 집요하며 후안무치하게 탈(脫)진영의 노력들을 억압하고 좌절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정의·공정을 향한 이성과 양심의 싸움은 지속되어야 한다. 유시민 이사장과의 논쟁에서 진중권 전 교수는 이기고 있었다. 팩트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