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경제학자

2020년, 한국 사회에 과연 슈베르트의 가곡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좀 자세히 보려고 나성인의 책 ‘슈베르트 세 개의 연가곡’(한길사)을 집어 들었다.

한국은 정치적 지형과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사회가 되었다. 형식미가 많은 것을 지배하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 사전에 갖춰야 할 것을 많이 요구한다. 보수만 그런 게 아니다. 진보도 뭔가 하기 위해서는 켜켜이 쌓인 형식적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생산자의 나라가 아니라 그걸 지시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산 LP 중의 하나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였다. 뭔지도 잘 모르고 제목이 좋아서 샀는데, 우울할 때마다 평생 꺼내 듣는 노래가 될 줄은 몰랐다. '88만원 세대'를 쓸 때 마무리 모티브로 잡았던 게 슈베르트의 '마왕'이었다. 품 안의 아이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딱 그 얘기 같았다.

통일 이전의 독일은 청년이 먹고살 수 있는 방안을 증명해야 결혼을 허용했다. 급진 청년들의 일상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이다. 슈베르트는 그걸 못 해서 결국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을 못 했다. 왕조의 복귀와 함께 예술을 찍어누르던 복고풍 정권에 반대한 노래가 '들장미'라고 알고 있다. 괴테 등 새로운 시가 등장하면서 음악도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하려던 진통을 앓고 있었다.

그 시절을 짧고 두껍게 살다간 사람이 슈베르트다. 친구는 선동죄로 군대에 끌려갔고, 슈베르트도 짧지만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나성인은 이런 혼돈 속에서 만들어진 연가곡집을 세밀하게 펼쳐 보여준다. 형식적으로는 고전적 정형미, 시대적으로는 왕조로 복귀하려는 반동의 한가운데에서 방랑자로 살다간 청년, 그가 슈베르트다.

책을 덮고 한국에서도 슈베르트가 나올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죽기 2주 전, 그는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자극받아 대위법 수업에 갔었다. 그가 음악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다 갖추고 작곡을 한 건 아니다. 그래도 전혀 새로운 가곡, 특히 연가곡이라는 새로운 흐름과 양식을 만들었다. 혼돈과 격돌, 아직 우리 사회가 가진 특징이지만, 한국에서 슈베르트는 숨 막혀서 작곡도 해보기 전에 죽을 것 같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실험, 그걸 허용하는 더 많은 틈새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