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 ‘복있는농장’에서 만난 아기 흑돼지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이내 풀고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기까지 하는 게 덩치 크고 순한 강아지 같다.

"꾸웨엑~ 꿱꿱 꾸웨엑~." 태어난 지 1~2개월 된 아기 돼지들이 살고 있는 자돈실(仔豚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새끼 돼지들은 낯선 인간이 두려웠는지 사육장 끄트머리로 날쌔게 도망쳤다. 하지만 경계도 잠시. 한두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곧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몰려들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코끝으로 다리를 쿡쿡 찌르거나 고무장화를 잘근잘근 이빨로 씹었다. 유난히 통통한 녀석 하나를 들어 안아봤다. 그새 맘에 드는지 가만 안겨 있었다. 경남 함양 '복있는농장' 박영식(61) 대표는 "요놈들이 겁도 많지만 호기심도 많아요. 꼭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죠."

한국 양돈 사업이 코너에 몰리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두렵고 값싼 수입 돼지고기에 가격 경쟁에서 밀린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토종 흑돼지. 성장이 더디고 살이 덜 붙는 토종 흑돼지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양돈 농가로부터 그동안 외면받았다. 하지만 양(量)보다 질(質)을 따지는 시대가 되면서 맛이 월등한 토종 돼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박영식 대표는 토종 돼지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 축협에서 16년 근무하다가 1995년부터 토종 돼지 사육에 나선 박 대표는 2007년 '신지식농업인'(농림부), 2017년 '최고농업기술명인'(농촌진흥청)에 선정됐다. 그의 농장은 전국에 보급하는 토종 돼지 종돈장(種豚場·씨를 받는 돼지를 기르는 곳)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가 키우는 토종 돼지의 공식 명칭은 '우리흑돈'. "토종 흑돼지는 흰 돼지에 밀려 멸종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나마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함양·산청·전북 남원 등지에 남아있던 토종 흑돼지를 축산과학원에서 듀록(Duroc)이라는 외래 품종과 교배시켜 국내 최초로 개량·복원한 품종이죠. 전체 DNA의 37.5%가 토종 돼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토종 흑돼지의 맛은 살리면서 외래 품종의 (빨리 크고 살찌는) 경제성을 결합시켰죠."

박 대표 농장에서는 흑돼지 총 7000여 두를 사육한다. 흑돼지 양돈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이 중 절반가량이 우리흑돈, 나머지는 '버크셔(Berkshire)'라고 하는 외국에서 수입해 한국화한 품종이다. 버크셔도 고기 맛이 좋아서 최근 각광받고 있는 흑돼지. 우리흑돈은 몸 전체가 새까맣다. 반면 버크셔는 몸은 까맣지만 코·발·꼬리 등 여섯 군데가 흰색이다. 버크셔를 '육백(六白)'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유다. 박 대표는 "우리흑돈만 하고 싶지만 아직 소비자 인지도가 낮아서 찾는 이들이 적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섞어서 키우고 있다"고 했다.

돼지의 일생은 양돈장 분만실에서 시작한다. 어미 돼지는 한 번에 새끼 8~10마리를 낳는다. 새끼들은 25일가량 어미 젖을 빨면서 크다가 자돈실로 옮겨진다. 같은 어미에게 태어난 놈들도 크기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더 빨리 크는 놈들도 있고, 반대로 작고 약한 놈들도 있어요. 큰 놈들이 사료를 줘도 먼저 많이 먹어요. 사육장 안에서 '생활환경'이 가장 좋은 밝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요. 약하고 작은 새끼들은 큰 놈들에게 치여서 사료를 많이 못 먹죠. 갈수록 크기 차이가 나요. 돼지들은 한곳에만 똥을 누는데, 약하고 작은 새끼들이 이 춥고 어둡고 냄새나는 '화장실' 옆에 서 지내죠. 그래서 크기별로 새끼들을 구분해 비슷한 놈들끼리 한데 넣어줘야 합니다."

자돈실에서 1개월 정도 큰 흑돼지는 이어 육성실과 비육실에서 각각 2개월씩 있으면서 다 큰 돼지가 된다. 180 ~190일, 대략 6개월가량 큰 돼지는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이렇게 키운 우리흑돈은 몸무게가 100㎏쯤 나간다. "엄청 큰 것 같지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육하는 흰 돼지는 165~170일이면 110㎏이나 나가죠. 20일가량 덜 키워도 무게는 더 나가죠. 사료가 덜 들면서 빨리 현금화할 수 있다는 뜻이죠. 사육 농가들이 흰 돼지를 더 선호하는 건 당연합니다."

재래 흑돼지와 듀록 돼지를 교배해 개량·복원한 우리흑돈 삼겹살과 목살. 짙은 색깔만큼 맛도 일반 돼지 삼겹살보다 진하다. 크림색 비계는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표가 우리흑돈에 희망을 거는 건 맛이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재래 돼지 유전자를 이어받아 고기의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근육의 섬유질이 가늘기 때문에 고기 결이 곱고 부드러워요. 고기가 육즙을 품는 능력을 말하는 보수력(保水力)이 뛰어나 굽거나 삶아도 퍽퍽함이 확실히 덜하고요."

박 대표가 "시식해 보라"며 우리흑돈 삼겹살과 목살을 접시에 담아 내왔다. 일반 돼지고기보다 고기 색깔이 진하다. 멧돼지 고기처럼 분홍색보다 선홍빛에 가깝다. 지방은 허여멀건한 흰색이 아니라 생크림처럼 뽀얗고, 삼겹살은 지방 두께와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일반 삼겹살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라면, 우리흑돈 삼겹살은 수제품이랄까.

불판에 아무 양념 없이 삼겹살과 목살을 구웠다. 고기 자체의 맛이 훨씬 진하고, 육즙이 촉촉하다. 무엇보다 지방 맛이 압권이다. 느끼하지 않고 우유처럼 고소한 맛과 향이 난다. 나이 지긋한 중식 요리사들은 "옛날에는 돼지비계를 녹여서 그 기름으로 짜장을 볶고 군만두를 구웠다"며 "요즘은 손님들이 꺼려 콩기름을 쓰지만 가끔 그리워서 돼지비계를 녹여 요리해보면 옛 맛이 나질 않는다"며 아쉬워한다. 그 말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이 맛난 토종 흑돼지 고기를 서울 등지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박 대표는 "흰 돼지가 압도적으로 많아 모든 유통·판매 체계가 흰 돼지에 맞춰져 있고, 그러다 보니 토종 흑돼지 고기는 팔기도 어렵고 사 먹기도 아직은 힘든 형편"이라고 했다. 도시 소비자가 우리흑돈을 맛보려면 전화 주문이 현재로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박 대표가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우리흑돈·버크셔 돼지고기 판매를 위해 만든 브랜드 '까매요'로 주문하면 다음 날 택배로 받을 수 있다. 100g 기준 삼겹살·목살 2650원, 갈비 1350원, 등심·안심 850원, 뒷다리살 650원. 소시지, 돈가스 등 육가공품도 있다. 버크셔 흑돼지는 '상하농원', '명품식탁K', '버크셔세상' 등 상대적으로 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