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음식 전문기자

프랑스 와인 12병이 지구에서 400㎞ 떨어진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지난해 말 배달됐다. 우주비행사들이 마시려고 주문한 건 물론 아니다.

이 와인들은 '스페이스 카고'라는 룩셈부르크 스타트업 기업이 프랑스 보르도 대학, 독일 바이에른 대학과 함께 과학 실험을 위해 우주로 보냈다. ISS는 크기가 축구장과 비슷한 초대형 과학 실험실. 지난 2011년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러시아 등 열여섯 나라가 참여한 국제 협력으로 완성했다.

ISS는 우주에 떠 있으니 당연히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우주 방사선에 노출돼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이나 동물이 겪는 변화를 알아보는 등 100여 가지 다양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그중 하나가 이번 와인 실험이다. 무중력과 방사선이 와인 숙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맛과 향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이 실험 목표다.

ISS로 보낸 와인 12병은 프랑스 보르도산(産) 레드와인. 어떤 포도 품종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와인은 병에 담긴 채 섭씨 18도를 유지하고 햇빛은 전혀 받지 않도록 스테인리스 통에 담겨 1년간 숙성한다. 1년 후 지구로 돌아온 '우주 와인'은 지상에서 같은 조건과 기간에 숙성한 같은 와인과 비교 분석할 예정이다.

와인은 양조만큼이나 숙성에 따라 그 품질이 지대한 영향을 받는 술이다. 그런 만큼 다양한 와인 숙성이 시도돼 왔다. 십수 년 전부터 유럽에서는 와인을 깊은 바다에서 숙성시키고 있다. 와인을 숙성·보관하기에 최적 조건은 햇빛이 닿지 않으면서 서늘한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공간. 이런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 천천히 오래 숙성한 와인이 최고의 맛을 낸다. 와인 저장고(셀러·cellar)가 대부분 깊숙한 지하에 있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심해(深海)는 빛이 닿지 않고 온도 변화가 거의 없이 서늘한 데다, 와인 맛에 악영향을 미치는 진동을 받지 않는다. 높은 수압 때문에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지 않아 입안에서 방울방울 터지는 기포가 중요한 샴페인 등 스파클링 와인 숙성에 특히 이상적이라고 알려졌다. 실제로 지난 2010년 북유럽 발트해(海) 바닥에서 170년 전 침몰한 선박에 실려있던 샴페인 168병이 발견됐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제정 러시아 차르(황제)를 위해 생산했다고 추정되는 샴페인이다. 가장 오래된 병은 생산된 지 200년이 넘었다. 와인 전문가들이 한 병을 따서 시음했다. 놀랍게도 벌꿀, 복숭아 등 샴페인 특유의 풍미는 물론 기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샴페인들은 경매에서 병당 최고 10만유로(1억3000만원)에 낙찰됐다. 지하, 심해 등 아래로만 향하던 와인 숙성 실험이 이번엔 위로, 하늘을 넘어 우주에 닿은 셈이다.

우주 숙성 와인은 과연 어떤 맛일까. 실험을 주관한 스페이스 카고는 "무중력과 방사선이 와인에 물리적·화학적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하지만, (워낙 실험적인 실험이라)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결과를 예측해볼 만한 과거 사례가 없지는 않다. 지난 2011년 스카치 위스키 회사인 '아드벡(Ardbeg)'은 자사에서 주조한 위스키를 ISS에 보내 2년간 숙성시켰다. 결과가 흥미롭다. 아드벡은 "2년간 ISS에 머문 위스키의 색과 향은 지구에서 5년간 숙성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이걸 와인에 적용해보자. 빨리 노화한다고 본다면 단점이다. 하지만 숙성을 촉진한다고 보면 장점이다. 프랑스 와인은 최소 2년을 숙성시켜야 출시할 수 있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다. 와인이 제맛을 내려면 숙성 기간이 최소 2년은 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와인을 우주로 가져가 숙성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더 빨리 와인을 팔 수 있고, 자본 회전이 좋아지니 와인 업체에 이득이다. '우주에서 숙성한 천상(天上)의 와인'으로 마케팅 할 수도 있겠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ISS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재미난 우주 실험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된장·간장·고추장을 ISS에 가져가 실험해보면 어떨까. 장류(醬類)도 와인만큼 숙성이 중요하니 말이다. 남들은 와인·위스키까지 들고 우주로 나가고 있는데, 한국의 우주 사업은 어디쯤 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