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홍 경제부 차장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 금융 위기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2008년 10월 13일 오후 3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과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삭스 회장 등 미국 9대 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이 미 재무부 회의실에 소집됐다.

회의 안건도 모르던 CEO들에게 헨리 폴슨 미 재무부 장관은 '은행 지분을 정부에 매각하는 데 동의한다'는 한 장짜리 계약서를 건네며 "사인할 때까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고 압박했다. 총 2500억달러, 우리 돈으로 300조원에 달하는 미국 금융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bailout) 조치의 시작이었다. 결국 회의 시작 3시간 30분 만인 오후 6시 30분 CEO들은 서명을 마치고 회의실을 나섰다. 천문학적 공적 자금 덕분에 이 은행들은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과 관련 파생상품 투자 부실로 촉발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공적 자금도 상환했다. 당국의 징계를 받고 물러난 CEO는 없었다. 다이먼 회장은 지금도 현직에 있다. 최고경영자가 투자할 당시에 제반 위험 요인을 검토하고 합리적 의사 결정을 내렸다면 사후에 손실이 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미국식 감독 관행이 적용된 사례다.

반면 똑같은 파생상품 투자 손실에 대한 한국 금융 당국의 대응은 달랐다. 금융 당국은 리먼 쇼크 1년 후인 2009년 9월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직무정지 상당'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우리은행장 재임 시절 투자했던 CDO(부채담보부증권)와 CDS(신용부도스와프)에서 나중에 1조6000억원가량 손실이 발생했다는 이유였다. "퇴임 이후 발생한 손실을 전임자에게 묻는 것은 억지"라는 황 회장의 반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계를 받고 물러난 황 회장은 징계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해 2013년 2월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실패한 투자의 책임에 대한 금융 당국과 사법 당국의 판단은 달랐던 것이다.

10년도 더 지난 두 사례를 소환한 것은 금융 사고가 터졌을 때 CEO에게 책임을 묻는 한국식 감독 관행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대규모 원금 손실이 발생한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의 책임을 물어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우리은행장 겸임)과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DLF 판매 당시 하나은행장)에게 최대 '문책경고'의 중징계를 통보했다. 이달 16일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중징계가 확정될 경우 오는 3월 임기가 끝나는 손 회장은 연임할 수 없고, 우리금융은 새로 회장을 뽑아야 한다.

금감원은 CEO 중징계의 근거로 내부 통제(사내 매뉴얼)의 미비 등을 제시했다고 한다.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주주 및 이해관계자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임직원이 준수해야 할 기준 및 절차(내부 통제 기준)를 마련해야 한다. 만일 이를 마련하지 않으면 CEO를 징계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은행은 이런 내부 통제 기준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CEO 징계감은 아닌 것이다.

DLF 사태로 최대 3000명가량의 고객에게 금전적·정신적 피해를 준 두 은행의 잘못을 덮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정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는 합당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잘못을 CEO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별개 문제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는 직원의 잘못으로도 대표이사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과잉 처벌'이 문제가 돼왔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285개 법률에 처벌 조항이 2657개나 되는데, 이 중 83%인 2205개가 대표이사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CEO가 파리 목숨이 되면 누가 실패 가능성을 무릅쓰고 새로운 도전과 실험에 나서겠는가. 과잉 처벌로 기업가 정신을 꺾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