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 찌개와 국이 같이 오른 적이 없었다. 찌개 하나에 김치, 반찬 두어 개가 늘 전부였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어머니는 밥상 차릴 시간이 없었다. 찬 기운이 돌고 얼굴 거칠어지는 겨울이 되면 미니멀리즘을 달리던 밥상이 조금 달라졌다. 어머니는 꼬막을 삶아 한쪽 껍데기를 떼어 접시에 냈다. 꼬막 위에는 일일이 양념간장을 올렸다. 일과 잠, 둘로 나뉜 팍팍한 시간, 가족끼리 웃으며 보낼 틈조차 많지 않았던 그때였다. 잔치 음식처럼 양념간장이 올라간 꼬막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한 음식 같았다. 아버지는 꼬막이 나올 때마다 별말 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작은 밥상 위에 올라간 어머니의 사랑을 아버지가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마흔이 채 되지 않았던 젊은 부부의 식탁이었다.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던 꼬막 붐이 분 지가 꽤 됐다. 백화점 지하를 가도, 강남 사거리 뒷골목에 가도 꼬막무침, 비빔밥을 판다. 파,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양념을 듬뿍 치고 먹는 그 음식에서 꼬막의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남은 것은 통통한 꼬막의 쫄깃한 식감 정도. 핏물이 쫙 빠진 새꼬막 맛만 보고 '이것이 꼬막이다'라고 하는 것은 섭섭하고 아쉽다.

서울 상봉동 ‘벌교꼬막포차’ 참꼬막(아래)과 간재미찜.

지금도 전남 벌교에 가면 좌판에 꼬막을 올려놓고 파는 아낙들이 있다. 서울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참꼬막, 피꼬막도 종종 보인다. 꼬막을 다루는 식당도 수십 군데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차림을 낸다. 그래도 예스러운 멋과 격을 갖춘 곳을 찾자면 '국일식당'이 있다. 메뉴는 여럿 있지만 시킬 것은 '꼬막 정식'이다. 따끈한 온돌방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허리가 굽은 노인이 찬을 담아 여러 번 오고 간다. 상차림을 보면 꼬막은 딸려올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홍어, 전, 묵, 각종 반찬이 한 상 쫙 깔린다.

만사 제쳐 두고 꽉 다문 꼬막을 따면 검은 물이 찰랑거린다. 아차 흐를세라 입을 갖다 댄다. 소고기로 따지면 미디엄 정도로 삶은 꼬막 살을 쏙 입에 넣는다. 바다, 그중에서도 근해 갯벌의 향이 느껴진다. 철분기 섞인 금속성 차가운 맛이 언뜻 비치다가도 살을 계속 씹으면 단맛이 적잖이 올라온다. 숨을 들이쉬면 반찬을 놓고 간 노인의 체취가 살짝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지막한 산과 평야가 펼쳐진 남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자. 강남 골목골목 남도 음식 한다는 간판을 달고 꼬막을 아니 내는 곳이 없다. 북서 방향으로 상봉동까지 간다. 이름부터 본격적인 '벌교꼬막포차'에는 늦으면 자리가 없다. 별 장식 없는 수더분한 실내에 엉덩이는 쉽게 주저앉는다. 메뉴를 훑고 수조를 쓱 보는 게 순서. 별난 생선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찍어 청할 수도 있다. 살이 녹아나는 병어조림도, 매콤한 양념을 듬뿍 올려 숟가락으로 퍼 먹는 간재미찜도 이 집의 필청 메뉴다. 작은 주방에서 일하는 아낙은 언제 가도 흥과 손맛이 넘쳐 어느 메뉴를 골라도 실패가 없다. 그중 이 집 이름을 만든 꼬막으로 가보자면 초심자는 새꼬막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비린 맛이 거의 없고 살에 단맛이 차서 하나하나 먹다 보면 옆에 높다란 조개무덤이 생긴다.

꼬막 좀 먹어봤다 하는 사람들은 새꼬막을 지나 참꼬막으로 간다. 조개 안에 물이 가득 차게, 입이 열리지 않게 삶는 것이 기본인데 이 집은 기본은 가볍게 넘는다. 어부의 굵은 주름살을 닮은 꼬막 껍데기를 벌리면 해 진 바다처럼 검은 물이 넘실거린다. 그 물과 함께 조갯살을 입에 넣으면 철새와 물고기, 조개가 노니는 갯벌이 펼쳐진다. 짭조름한 바닷물, 해 질 녘 들어오는 먼바다의 신선한 바람, 그물을 당기는 굵은 팔뚝처럼 원시적인 살의 질감, 심장이 뛰는 원초적 생명의 맛. 한참 먹다가 잠시 숨을 고르면 앞에 놓인 것은 빈 접시뿐이다. 작은 그릇, 황량한 도시, 별것 없는 인생.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맛과 정성은 작지 않다. 어릴 적 좁은 집에 감돌던 부모님의 사랑이 그랬다. 지금껏 살아온 그들의 삶이 또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