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이북의 북촌(北村)은 전통적 의미의 한옥 마을이 아니다."

겨울비 내렸던 지난달 26일. 서울 가회동 한옥마을에서 만난 이경아(44)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말했다.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서울 전체의 한옥은 1만1700여 동(2014년 서울연구원 조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종로구에 35%(4100여 동)가 몰려 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지금 가회동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은 80~1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시대 한옥과는 지어진 배경과 형태가 다르다"고 했다. "1970년대 강남 개발 이전까지 북촌은 전통 한옥 마을이라기보다는 최신 주거 문화를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hot place)'에 가까웠다."

실제로 북촌엔 한옥뿐 아니라 근대 서양식 주택부터 일본식·절충식·다세대 주택과 빌라에 이르기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대별 주택이 모두 남아 있다.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학부와 석·박사를 모두 마친 이 교수는 최근 일제강점기의 주택 개발 열풍을 재조명한 '경성의 주택지'(도서출판 집)를 펴냈다.

서울 북촌 한옥 마을에서 만난 이경아 교수. 그는 “100여 년 전 인구 폭증과 주택지 개발 열풍은 오늘날과 무척 닮아 있다”며 “북촌 역시 한옥과 서양식이 뒤섞인 실험장이자 핫 플레이스였다”고 했다.

'경성의 주택지'는 우리가 알고 있던 주거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조선 시대 한양의 인구는 10만~20만명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25만명, 1930년대 40만명, 1940년대에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인구 급증으로 극심한 주택난에 시달리자 개발업자들이 앞다퉈 택지 개발과 분양에 나섰다. 100년 전 서울에도 '주택지 개발 열풍'이 불었다는 얘기다. 삼청동의 바위산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주택지로 개발했다. 공동묘지가 있었던 신당동 일대엔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섰다. 한옥과 서양식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주택'이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우리가 전통으로 알고 있는 것도 실은 근대의 산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오늘날처럼 브랜드를 내건 주택들이 등장했다. '조선인 건축왕'으로 불렸던 정세권(1888~1965)은 1934년 회사 이름인 건양사(建陽社)에서 따온 브랜드 주택 '건양주택'을 내놓았다. 개량형 한옥 단지로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1920년대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원했다. 1930년대에는 2층 양옥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하는 등 '우리말 큰사전' 출간을 돕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에도 지방 부호들이 자녀 교육열 때문에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가회동 일대 거주자들의 출신지·직업·학교 등을 조사했다. 그랬더니 강원·경상·전라·충청·평안도 등에서 올라온 행정 관료, 회사 사장, 은행원, 변호사, 무용가 등 중·상류층이 특히 많았다. 이 교수는 "북촌 일대는 지방 지주 출신의 경제력 있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주택 사업을 벌였던 곳"이라며 "이 때문에 가옥 규모도 비교적 크고 다양한 형태의 실험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학부 시절 T자를 들고 제도판에 선을 그었던 건축학도였다. 하지만 전남 진도의 전통 마을에 현지 답사를 다녀온 뒤 건축사(史)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때부터 동아시아의 주거 문화에 대한 비교 연구에 나섰다. 석사 때는 중국 전통 가옥 양식인 사합원(四合院)의 공산화 이후 변화 과정을 연구했다. 그는 "서양식 아파트와 전통 온돌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이 적응하고 기억하는 것이 주거 문화"라며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주거에는 인류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역사가 모두 녹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