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모니터 안 가상세계에도 비가 내린다. 싱가포르, 이 도시국가의 구석구석 온도와 습도·강수량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실제 세계와 똑같이 디지털로 구축된 가상세계 안에서 인공지능(AI)은 그동안 수집한 데이터를 근거로 어느 도로가 곧 막힐지, 어느 곳에 가면 택시가 잘 잡히는지를 제시했다.

최근 찾은 싱가포르 스타트업 '하이버랩(Hiverlab)'에서 가상현실 안경을 쓰자 펼쳐진 모습이었다. 실제 싱가포르를 디지털 세상에 그대로 복제한 이른바 '디지털 트윈(쌍둥이)' 기술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도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최진원(오른쪽) 탐험대원이 싱가포르의 디지털 트윈 스타트업 하이버랩을 찾아 체험하는 모습.

디지털 트윈은 도시·제품·공장·건물, 심지어 인간 등의 디지털 복제본을 뜻한다. 태풍 같은 자연재해나 공장 화재 등의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훈련은 실제 세계에서 진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재활 치료 같이 인간의 몸에 관한 실험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트윈은 이런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디지털 공간 안에서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방대한 디지털 데이터 축적, 기계 학습과 AI 기술 발달, 나날이 빨라지는 초고속 인터넷, 데이터 시각화 기술, 증강·가상현실 응용 등 21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최첨단 디지털 기술이 디지털 트윈에 집약돼 있다. 미국 시장조사 기관 마켓앤드마켓은 현재 35억달러(약 4조원) 정도인 디지털 트윈 관련 시장 규모가 5년 후쯤엔 10배 넘는 351억달러로 '폭풍 성장'하리라고 전망한다.

◇싱가포르 전체를 디지털로 재구축

하이버랩은 싱가포르 정부가 대주주인 통신회사 싱텔(Singtel)과 손잡고 정부 데이터를 활용한 '미래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지털 트윈 기술을 통해 싱가포르 전체의 도로, 건물, 대중교통 시스템 등을 복제하고 나서 도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활용하는 프로젝트다. 2014년 문을 연 이 기업은 날씨와 교통 관련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AI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폭우가 쏟아지면 가상 세계 속에서 오가는 차량을 분석해 어느 길이 유난히 더 막힐 예정인지를 분석한다. 비가 쏟아질 때 유난히 택시 수요가 많은 지역을 시뮬레이션해 택시를 추가 배치하는 것도 가능하다.

싱가포르에선 실제 도시를 복제해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디지털 트윈(쌍둥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만든 유명 관광지 마리나베이 샌즈 일대의 가상현실 이미지에 디지털 트윈 스타트업 하이버랩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합성한 이미지.

이날 가상현실 속에서 '택시 수요'라는 항목을 지목하자 빨강·노랑·주황·초록 막대들이 나왔다. 구역별로 수요에 비해 택시가 얼마나 모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데 택시가 적으면 빨강, 보통은 주황, 많으면 초록이다. 초록 구역에 있는 택시를 빨강 구역으로 이동시키면 택시 기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더 유익해진다.

하이버랩은 앞으로 문화 콘텐츠 등 다른 분야 데이터들을 추가로 투입해 더 자세한 쌍둥이 도시를 재현해낸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하이버랩 이위안 프로듀서는 "과거 디지털 트윈 기술의 가장 큰 걸림돌은 '도시 전체' 같은 초대형 데이터가 오갈 수 있는 빠른 통신망이 없다는 점이었다"며 "최근 발달한 5G(5세대) 이동통신 덕분에 디지털 트윈의 적용 범위도 빠르게 확대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 계획 때 디지털 '쌍둥이'로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 속 도시는 컴퓨터로 도시를 만드는 게임 '심시티'와 비슷해 보였다. 다만 진짜 도시, 진짜 거리, 진짜 건물을 토대로 구축한 가짜 도시라는 점이 차이였다. 싱가포르는 이미 구축된 도시의 생활을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의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도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접목했다고 한다. 세계 최다 물동량을 처리할 아시아 최대 항만 '투아스 메가포트' 건설에 디지털 트윈 기술을 본격 투입한 것이다. 싱가포르 국립대 이호빈 산업시스템 연구원은 "선박·컨테이너·화물차 등 항만에 필요한 모든 요소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입력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20~30년 후에 이 항만이 어떤 형태로 구축돼 작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지를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휴양지 마리나베이 샌즈 일대의 실제 모습. 디지털 트윈 기술을 통해 이 일대를 가상 세계에 복제한 후 교통이나 재난 대응 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실제 세상에서 투아스 항만은 이제 막 터를 닦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만큼은, 항만이 이미 활발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 연구원이 보여준 모니터 속에선 배가 오갔고 컨테이너들이 배에 오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싱가포르국립대 앤드루 니 기계공학과 교수는 "사물인터넷(IoT), 실시간 데이터 수집 같은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디지털 트윈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예컨대 디지털 제조업 회사 GE는 공장 기계에 대한 디지털 트윈을 만들었다. 시뮬레이션을 진행해 실제 날씨나 가동률 등에 따라 고장 날 가능성이 큰 부품을 미리 교체하는 식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영국 뉴캐슬시는 이 기술을 홍수가 났을 때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 중이다. '포뮬러1(F1·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 대회)' 참가자들은 경주용 차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어 최적의 정비법을 찾아낸다.

니 교수는 인간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어 활용하는 사례도 보여주었다. GE 헬스케어는 사람의 몸에 센서를 부착해 디지털 쌍둥이를 만들어낸 후, 의료 및 건강관리에 이를 활용하는 의학용 디지털 트윈을 개발했다. 의사는 '디지털 나'를 관찰하면서 적절한 처방과 조언을 해줄 수 있다. "사람의 몸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개인 맞춤형 의학 처방을 할 수 있다면 인류는 더 건강해지겠지요. 약을 얼마나 먹는 게 적절할지, 수술을 한다면 입원 일수는 며칠이 적당할지, 병원은 얼마 만에 한 번씩 방문해야 하는지… '바로 당신'을 위한 정교한 건강관리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니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류가 장기 이식을 위한 실제 복제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내용의 공상과학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렸다. 실제 복제인간을 만드는 설정은 섬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 속의 '가상 최진원'이 내 건강을 챙겨주고 적절한 경고와 조언을 해주는 세상은, 참 근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