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토론 문화가 없음을 개탄해왔는데 알고 보니 넘치도록 많았다. ‘토론’이라는 말은 영어 ‘discussion’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원래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심히 결연하다.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결기로 충만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

우리가 주로 하는 것은 discussion이 아니라 debate(논쟁)다. 차라리 debate를 '토론'으로 규정하고 이제부터는 '토의(discussion)'를 하자는 제안도 있다. 토의가 토론보다 덜 논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의'와 '논'의 자원(字源)을 들여다보면 좀 뜻밖이다. 의(議) 자는 '말씀 언(言)'과 '옳을 의(義)'가 합쳐진 것인데, 義 자는 양의 머리를 창에 꽂은 제사 장식을 형상화한 글자로 올바름을 신에게 아뢴다는 뜻이다. 반면 논(論) 자의 '둥글 륜(侖)' 부는 죽간을 둥글게 말아놓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의견을 두루 주고받는 과정을 뜻한다. '의'가 다분히 하향(top-down)식인 데 반해 '논'은 상향(bottom-up)적이라 훨씬 민주적이다.

더 큰 문제는 ‘토’에 있었다. ‘칠 토(討)’ 자는 ‘공격하다’와 ‘두들겨 패다’에서 ‘비난하다’와 ‘정벌하다’라는 의미까지 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그동안 토론 제대로 해온 셈이다. 요즘 선진국의 숙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숙의(熟議)란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한다. 나는 이참에 ‘discussion’을 ‘숙론(熟論)’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대의 민주주의를 하자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대화는 고사하고 제대로 마주 앉을 줄도 모른다. 새해에는 우리 시민이 나서서 숙론의 장을 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