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나보고 '책 몇 권 있으세요?' 하는데 그것처럼 촌스러운 게 없어요. 컴퓨터로 구글에만 들어가면 책이 800만 권인데!"

7대의 컴퓨터가 둘러싼 이어령(85) 전 문화부 장관의 책상은 작은 우주선 같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 2층. 대장암 투병 중인 그가 매일 출퇴근하는 서재의 풍경이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사후(死後)에 이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이 꾸려온 인근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자리엔 강연·인터뷰 영상과 자료를 모은 '이어령 아카이브'를 만들어 연구자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강인숙(86) 영인문학관장은 "우리 부부의 마지막 준비"라고 했다.

서재에 나란히 앉은 이어령(왼쪽) 선생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이어령은 “혼자 하는 글쓰기를 대중화하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문학관의 사명”이라고 했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과 강인숙의 '영'과 '인'을 딴 이름으로 2001년 개관했다. 국문학자 강인숙은 60대 중반 인후암 판정을 받은 후 더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문학관 설립에 나섰다. 이어령이 '문학사상'을 발간하면서 수집한 원고와 잡지 표지에 실은 문인들의 초상화, 강 관장이 모은 문인·화가의 애장품들을 전시한다.

강인숙 관장은 20주년을 기념해 내년 4월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전을 연다고 했다. "이상이 후대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려고 해요. 어휘가 풍부하고 표준어의 발전을 온전히 보여주는 서울 문인이라 후배 문인들이 언어적 영향을 많이 받았죠."

이어령 선생은 "'영'은 디지털, '인'은 아날로그이니 영인문학관 자체가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라며 웃었다. "나는 막 어지르고 창조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저 사람은 새것도 싫어하고, 컴퓨터도 못 하고. (아내는) 독일 병사처럼 정확한 사람이에요. 하나하나 조사하고 책을 쓸 때도 꼬박꼬박 각주를 달죠."

실제로 강인숙 관장은 이상의 노트, 김동인의 명함, 박완서의 육필 원고 등 문인의 옛 물건을 보물처럼 아낀다. 소장품을 빌려줄 때도 "애를 남의 집에 보내는 것처럼" 걱정이다. 문학관 살림은 표 값으로 겨우 전기료를 낼 정도지만 강 관장은 "가난한 살림에는 이골이 나서 괜찮다"고 했다. "처음엔 방 한 칸 얻어 결혼했고 5년쯤 됐을 때 20평짜리 집을 샀어요. 문인들 사이에 '대궐 같은 집을 샀다'는 소문이 났지요. 저녁 먹을 돈도 없고 다방 갈 돈도 없으니까 다들 몰려와서 자고 갔죠."

강인숙(오른쪽) 관장과 컴퓨터 7대가 둘러싼 책상 앞의 이어령 선생.

부부는 1952년 피란지에서 열린 서울대 국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그 당시엔 개화기 사람들처럼 이 선생, 강 선생 하면서 문학 얘기나 하고 연애할 장소도 없었어요. 전부 폐허라 갈 데는 다방뿐인데 돈도 없고…"(이어령) 강 관장은 "그때 이 선생은 여자 친구도 많았고, 눈에 띄는 여학생마다 데이트를 했다"며 웃었다.

강인숙은 에세이 '어느 인문학자의 6·25'에서 60여년 결혼 생활을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그의 일생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기를 쓰면서 사니까 아이들이나 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간에 관한 한 그는 언제나 스크루지였다." 그러나 강 관장은 "예술가가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인지 알고 결혼했으니 괜찮다"면서 "일요일엔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과 놀아줬으니 그거로 족하다"고 했다. "글 쓸 때는 말을 못 걸어요. 궂은 얘기는 다 감추고 좋은 얘기만 하는데 그럼 나중에 또 속였다고 화내요. 맨날 아기 가진 여자 같지 뭐."

부부는 10여년 전부터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별산제(別産制)'를 시작했다. 현재 위치로 문학관을 신축 이전하면서 강인숙 관장이 부부의 마지막 재산까지 쏟아붓자 이어령 선생이 앞으로의 인세는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어령은 "내 모든 사유물은 내 작품 읽어준 독자들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다시 독자들에게 돌려줘야죠.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작지만 보석 같은 문학관으로."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관은 "외로운 방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창작 과정 전체를 보여주는 문학관"이다. "인류가 혼자 하는 수공업이 딱 하나 남았는데 그게 바로 문학이에요. 펜 한 자루와 상상만 있으면 그리스·로마부터 미래의 SF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방 안에서 혼자 하는 죄수의 작업을 대중화시키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문학관의 사명이죠."

그의 서재는 7대의 컴퓨터, 태블릿PC 여러 대와 전자펜, 각종 녹음과 영상 장비를 갖췄다. 사고 과정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1차부터 4차까지 원고 수정본도 줄 맞춰 전시돼 있다. 그는 "작가의 서재가 자궁이라면 문학관은 무덤"이라며 "내 창작 과정을 전부 볼 수 있는 이곳이 자궁이라면 새로 만드는 아카이브는 강연과 인터뷰 자료가 모여 있는 무덤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강인숙 관장은 지방에 큰 기념관을 짓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이어령은 "작고 초라해도 살던 곳, 살던 방에 짓는 게 좋다"며 반대했다.

이어령은 "내가 지금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이라고 운을 떼더니 "그날의 나는 절대 병원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입니다. 이 방은 꾸미지 않고 내가 마지막으로 글 쓴 순간 그대로 놔두라고 했어요.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세상 떠난 이 아무개가 마지막으로 글 쓰던 순간의 서재를 보여주는 거죠."

☞영인문학관

영인문학관은 문인들의 초상화, 육필 원고, 애장품 등 한국 문학의 귀중한 자료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강인숙 관장은 "이 땅에 문학박물관 하나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작은 규모로나마 시작했다"고 했다.

첫 전시는 문인들의 초상화. 1972년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을 창간하면서 화가들이 문인의 얼굴을 그려 표지에 싣기 시작했다. 천경자가 그린 노천명, 오수환이 그린 윤동주 등 저명한 화가가 그린 문인 100여 명의 얼굴이 전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