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밀가루를 큰 그릇에 넣었다. 소금 한 꼬집과 올리브유 한 스푼이 뒤따랐다. 그것들을 손으로 살살 섞다가 한 덩어리로 뭉쳐 반죽을 치댔다. 반죽에 탄성이 생기면 고등학교 시절 체육선생님이 들고 다니던 몽둥이 같은 나무 밀대로 슬슬 밀어 칼로 썰었다. 영국 요리학교 시절 배운 '수제 파스타 면' 만드는 방법이었다. 인도양과 지중해 건너 영국에서 만난 것은 파스타였지만 또 다른 이름이 칼국수였다. 선생님 왈, 이탈리아에 가면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곱은 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하고 파스타 면을 민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도 그랬는데'라는 생각도 잠깐이었다.

그해 여름, 영국 런던의 별 받은 레스토랑에서 구식 수(手)작동 기계로 파스타 면을 만들던 요리사를 보면서 나의 멜랑콜리는 안드로메다로 갔다. 파란 눈에 코가 높았던 영국 요리사는 노래를 하듯 'F'자 욕을 하며 파스타 면을 뽑았다. 면은 기계가 아닌 이상 한 번에 많이 만들 수도 없고, 빨리 뽑을 수도 없다. 일정한 속도로, 경보를 하듯 쿵짝 쿵짝 인내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주문은 밀리지, 할 일은 많지, 그 와중에 파스타 면까지 그때그때 뽑았던 그의 입이 더러워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수제'자가 붙으면 그만큼 당연히 값이 뛴다. 칼국수만큼은 예외다. 워낙 싼 음식이었던 '전통' 탓인지 사람들은 칼국수에 만원짜리 한 장도 아까워한다. 비록 값이 싸다 할지언정 거기에 드는 정성이 적다는 뜻은 아니다.

의정부 자금동에 가면 칼국수를 팔아 건물을 올린 '국시집 밀가마'가 있다. 공원 같은 주차장에 각 잡힌 건물 모양새를 보면 미술관이나 전시관 같은 느낌도 든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그림이나 전시품 대신 커다란 유리 벽으로 만든 네모난 방이 보인다. 그 안에 왜소한 노인이 홀로 서 있다. 하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그가 하는 일은 칼국수를 미는 것이다. 주차장이 매번 가득 차고 사람들은 줄을 선다. 노인은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밀가루를 밀고 또 민다. 한 그릇 청해 먹어보면 면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한 가닥 한 가닥 먹을 때마다 승천하는 이무기 수십 마리가 입속에 들어오는 것 같다. 사골로 낸 국물에 전분이 얇게 풀려 산조 가락처럼 유장한 맛을 내고 이따금 씹히는 청양고추가 딱 하고 툭툭 묵직한 박자를 넣는다.

서울 오장동 ‘고향집’ 손칼국수(앞)와 보쌈.

성수동 뚝섬역 '훼미리 손칼국수 보쌈'은 새로운 가게가 정신없이 들어서는 성수동 언저리에서 30여년 역사를 가진 드문 집이다. 감자전, 해물파전, 보쌈, 만두 같은 오래된 이름이 메뉴판에 툭툭 박혔다. 좌중을 살피면 카센터·구두 공장에서 기름밥, 먼지 밥 좀 먹은 이가 꽤 보인다. 목에 낀 먼지를 씻어야 한다는 핑계로 시킨 돼지수육은 기름기가 선명하게 흘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파전도 두께와 너비가 남달라 젓가락 들 때 손가락에 힘을 꽤 줘야 한다. 이 집 이름을 책임진 칼국수는 머리를 곱게 빗은 채 상 위에 올라온다. 부글부글 힘이 끓는 국물에 얌전한 면발이 들어앉아 있다. 그 둘은 서로를 꽉 껴안은 듯 따로 놀지 않는다.

냉면으로 유명한 오장동에 가면 '고향집'이라는 집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댁 같은 옛 가정집을 개조해 식당으로 만든 이곳은 이름처럼 수더분하고 예스러운 칼국수를 판다. 잘 정돈되어 어지러운 구석 하나 없는 실내에 마음이 놓인다. 자리에 앉으면 간이 된 수육 한 접시에 후춧가루 살짝 뿌린 무채와 콩가루를 곁들여가며 국수를 기다리는 게 순서다. 연로한 주인장이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모아 민 칼국수는 시간이 걸린다. 정화수 한 그릇처럼 단정하게 올라온 국수 면발은 바람처럼 하늘하늘 얇고 부드럽다. 사골 아닌 멸치 육수에 애호박 올라간 국물은 동글동글 상냥하다. 순한 국물과 면발에 그릇 바닥을 보는 일은 숨 쉬듯 자연스럽다.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칼국수 한 그릇을 물리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그사이 맨몸과 맨손으로 이룩한 시간이 서서히 흐르고 있다. 그 사람들과 음식도 조금씩 멀리, 되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