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엔 독립운동 자료만 있는 게 아니다. 1911년 주시경(1876~1914) 선생이 '말모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1957년 완간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 17권 중 5권(등록문화재 제524-2호)이 이곳에 있다. 국어학자인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로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등 귀한 한글 자료의 보고(寶庫)인데 학계는 물론 독립기념관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가 쓴 '의대리 건국 삼걸전(意大利建國三傑傳·1902)'을 주시경이 1908년 우리말로 옮긴 '이태리 건국 삼걸전'이 주목받는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활약한 마치니·가리발디·카부르 등 세 영웅의 활약상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우리말본에 앞서 1907년 단재 신채호가 발간한 국한문 혼용체 번역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주시경이 순한글로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 표지(왼쪽)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지은 ‘조선말 교과서’ 둘째 책 표지.

정 교수는 "로마, 유롭(유럽) 등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다수 국명(國名)과 외국 지명(地名)이 여기서 시작됐고, 띄어쓰기를 처음 시도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단재의 국한문 번역본에는 유럽을 구주(歐洲)나 구라파(歐羅巴), 로마를 라마(羅馬)라고 표기했다. 이탈리아 표기 변천도 보인다. 량치차오는 '意大利(의대리)'라고 썼으나 단재는 '伊太利(이태리)', 주시경 역시 이태리로 표기한다. 정 교수는 "외래어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한글 표기법이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을 빼앗기면 민족정신과 문화도 말살된다고 믿었다. 정 교수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 주시경 선생은 이탈리아 세 영웅의 정신이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며 "표지와 책 뒤에는 '번역자 주시경'이라고 명기돼 있지만 권두(卷頭)에는 '대한국 이현석 번역'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 혼자 완역한 게 아니라 공동 번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1928)이 지은 '조선말 독본' 첫 책과 '조선말 교과서' 둘째 책도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1927년 중국 북경 독립단 지부와 미국 하와이 독립단 총부에서 간행한 것으로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과서다. 정 교수는 "외국에서 만든 최초의 한국어 교재인 데다 독립기념관에만 있는 유일본이라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