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자는 고려청자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이에 관한 세 가지 기록을 살펴본다. 우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 '백자꽃무늬병'(오른쪽 아래 사진)은 영국제다. 병 아래에는 '사이몬 필딩'이라는 영국 회사 마크가 찍혀 있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 금색으로 박혀 있는 '백자오얏꽃무늬탕기'(오른쪽 위 사진) 제조사는 일본 '노리다케(Noritake)'이고 제조 연도는 1907년이다.

바로 그 무렵 러시아제국이 조선을 노리며 만든 1256페이지짜리 보고서 '한국지(КОРЕИ·1900)'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이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기술을 전수받았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국역 한국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p493, 500) 마지막으로 1697년 숙종 때 기록은 이렇다. '(왕립 도자기 공장인) 경기도 분원에서 굶어 죽은 도공이 39명이나 됩니다.'(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명나라, 베트남과 함께 첨단 백자 원천 기술 보유국인 조선에서, 그 제조 기술자들은 집단 아사(餓死)했고, 기술은 몰락했고, 그 결과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일제 그릇을 수입해 썼다는 모순된 이야기.

국가가 독점한 백자 생산과 수요

1428년 명나라 황제 선덕제가 조선 국왕 세종에게 청화백자를 선물했다. 그때 조선은 청자에 흰색 유약을 바른 분청사기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때부터 상감청자 제조 기술이 탁월했던 조선은 곧 청자보다 높은 열이 필요한 백자 생산에 성공했다. 그 우윳빛 자기에 명나라에서 수입한 푸른 안료를 덧씌우니 명나라 황제 하사품인 청화백자 제조 기술도 곧 습득했다. 조선 왕실은 전국 자기 장인들로부터 관청용 청화백자를 세금으로 거둬 수요에 충당했다.

조선 관요인 경기도 광주 번천리 5호 가마터 복원 현장. 폐기된 백자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한때 명나라, 베트남과 함께 세계 3대 백자 기술 보유국이었던 조선은 기술자에 대한 멸시 풍조와 영리행위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로 완전히 후진국으로 추락했다. 조선관요에서 근무한 사기장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는 물론 영업할 권리도 박탈된 기술자들이었다.

그러다 1467년 경기도 광주에 왕립 자기 공장인 관요(官窯)를 설립하고 직접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화백자를 만드는 회회청(回回靑) 안료는 수입품이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회회청 수출을 금지하면서, 기술은 있어도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1485년 조선 정부는 개국 93년 만에 성문법전을 종합해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이렇게 규정했다. '금이나 은 또는 청화백자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는 서민은 곤장 80대 형에 처한다.'('대전통편' 형전 금제) 서민은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역으로, 서민 위의 신분은 값비싼 청화백자를 사용할 독점적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조선 백자를 조선 백성이 구경도 할 수 없는 시대가 계속됐다.

직업 선택권이 없던 도공들

자기 제작은 기술을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 안정적인 자기 공급을 위해서는 적정 인원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관요에서 그릇을 만드는 사기장(沙器匠)은 세습직이었다. 1542년 편찬된 법령집 '대전후속록'은 '사기장은 그 업을 대대로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또 '경국대전'은 왕실 자기 관리기관인 사옹원 소속 사기장 인원을 380명으로 규정했다. 처음에는 전국 사기장 1140명이 3년 단위로 차출됐다가 숙종 대에는 아예 관요 주변에 마을을 만들고 사는 전속 장인들로 관요를 운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박탈된 세습 장인이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가마를 땔 나무를 찾아 경기도 광주 경내를 이동하며 가마를 만들고 그릇을 만들었다. 320군데가 넘게 발굴된 광주 가마터 주변에는 사기장들과 그 가족들로 큰 마을을 이루곤 했다.

굶어 죽은 도공들

번천리 가마터에서 나온 '갑발'에 새겨진 한글. '손맜소니'라고 적혀 있다. 조선 백자를 만든 기술자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1697년 어느 봄날, 그 광주에서 도공 39명이 한꺼번에 굶어 죽은 것이다. 도공은 그 직업이 천한 공업인지라 신분은 천민이거나,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취급을 받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 대부분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들은 그릇을 굽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697년 광주 관요에서 올라온 보고는 이러했다. '이들은 원래 농업이나 상업으로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 지난해 개인적으로 그릇을 굽지 못하여(本無農商資生之道, 且失上年私燔之利) 모두 굶주리게 되었나이다.'(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한두 명도 아니고 마흔 명에 이르는 전문직업인이 한꺼번에 아사했다! 굶어 죽은 자는 39명이었고 힘이 없어 문 밖 거동을 못하는 자는 63명에 가족이 흩어진 집이 24집이었다. 남은 자들도 힘이 없어 그릇 형태를 만들지 못할 지경이었다.(윤3월 2일 '승정원일기')

관요에서 도주한 자는 곤장 100대에 징역 3년 형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전록통고' 사옹원 사기장 도망)이 있을 정도로 도공 생활은 힘들었다. 조선 정부는 지킬 수 없는 법으로 견딜 수 없는 의무를 국가 수요를 위해 강제했다.

위 보고에 '사번(私燔)을 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 용도로 그릇을 굽지 못했다'는 말이다. 국가 재산과 시설로 개인적인 이권을 챙긴 범죄행위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사번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묵인돼온 관행이었다.

금지된 영리행위, 기술의 실종

집단 아사사건 57년 뒤인 1754년 7월 17일 영조는 '용이 그려진 왕실용 그릇 외에는 청화백자를 금한다'고 명했다. 값비싼 회회청이 사치 풍조를 조장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검소했던 영조는 또 '기교와 사치 폐단을 막고 장인들의 일을 덜 수 있도록 장식이 달린 부채 제작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1768년 8월 8일 '비변사등록')

영조를 이은 정조도 같은 정책을 이어받았다. 재위 15년째 되던 1791년 9월 24일 정조는 '괴이하게 생긴 그릇을 비밀히 만드는 자들은 모두 처벌하라'고 명했다.(같은 날 '정조실록') 4년 뒤 정조는 '내열 덮개(갑발)를 씌워 먼지와 파손을 막는 고급 자기 제작을 금하라'고 명했다. 이를 '갑번(甲燔)'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와 갑번을 허용해야 한다고 보고한 어사를 의금부에 넘겨버렸다.(1795년 8월 1일 '일성록')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백자오얏꽃무늬탕기'. 가운데에 금색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그릇은 일본 그릇 회사 '노리다케'제품이다. 제조 연대는 1907년이다. 오른쪽은 역시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영국 '사이몬 필딩'사의 '백자꽃무늬화병'. 구한말 조선에는 이런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첨단 요업 국가 조선에서 수입 그릇을 쓰게 된 것이다.

갑번을 금하고 어사 감찰을 지시한 이유는 이러했다. '사기(沙器)의 낭비는 사치스러운 풍조의 일면이다. 갑번을 금지하면 사기장들이 이득을 보지 못한다니 이보다 더 해괴한 일이 없다.' 이미 9개월 전 갑번 금지 문제가 안건에 올랐을 때 조정에서는 이런 합의가 이뤄져 있었다. '전에도 나름대로 생계를 꾸렸을 텐데 감히 원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794년 11월 16일 '일성록', 좌의정 김이소 보고)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술자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위선적인 윤리와 법이었다. "(사번을 허용하면) 귀천에 구별이 없어지고 법금이 확립되지 않는다(貴賤無別法禁不立)." 국왕 정조가 한 말이다. 천한 사기장이 이득을 취하면 규율이 서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첨단 요업 기술자가 굶어 죽었다. 기술도 함께.

기술 방치의 참혹한 결과

첨단 자기 제조술 보유국이 그 기술자와 생산품을 무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는 가는 곳마다 조선 사기장을 대거 납치해 끌고 갔다. 이들이 휩쓴 지역은 영남과 호남, 충청, 함경, 강원도로 관요가 있는 경기도 광주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각 지역 민요(民窯)를 운영하던 사기장들이 대거 납치됐다는 뜻이다. 그 사기장들이 귀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귀환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일본 기록은 물론 조선통신사 기록에도 숱하게 나온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 기록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조선 사기장 후손들이 이삼평, 심수관 같은 이름으로 지금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구한말 외교 담당 부서인 통리아문의 서류를 모아놓은 '소지등록(所志謄錄)' 1891년 2월 16일 자 모음집에는 이봉학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건의한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나라 장인은 백 가지 제조 기술이 극히 어둔한데, 특히나 사기장이 심각해 외국 제품에 밀려 폐업하기 일쑤다. 그러니 일본 장인 2명을 고용해 배우려 하니 허가 바란다.' 게임이 끝난 것이다.

그 상황을 1900년 러시아 정부 조사단은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인들은 제조업 몇 분야에서 이웃나라인 일본인들의 스승이었다. 일본은 도기와 칠기 기술을 배워갔다. 그러나 이후 한국인들 자신은 이 제조 기술을 완성하는 일을 중지했을 뿐 아니라 과거 수준을 유지할 능력조차 갖지 못하게 됐다. (중략) 현재의 조잡한 한국 자기 제품을 보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국역 한국지', p494 등)

1881년 조사시찰단 단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젊은 관료 어윤중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본에 딴 뜻이 있냐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그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강의 길을 얻어 행하게 되면 저들은 감히 다른 뜻을 품지 못할 것이다. 이웃나라의 강함은 우리에게는 복이 아니다.'(어윤중, '종정연표' 1881년 12월)

훗날 고종은 그 강해진 이웃나라 일본 그릇회사 노리다케에 대한제국 오얏꽃 문양을 넣은 탕기를 주문해 사용했다. 첨단 요업 기술국의 철저한 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