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빵사가 윗옷을 벗어 젖히고 빵을 굽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옆에는 난데없이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염소가 뛰논다. 황도 12궁 중 12월인 염소자리의 상징이다. 이 그림은 16세기 초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제작된 ‘루트비히 9편 16번 시도서(時禱書)’ 중 달력의 한 면이다. 현 소장처에서 편의상 이전 소장자의 이름을 따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제작자와 주문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작자 미상, 루트비히 9편 16번 시도서 중 12월, 16세기 초, 양피지 위에 템페라, 13.5×10.5cm,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박물관 소장.

시도서란 평신도들이 수도원의 사제들처럼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작은 서적으로 기도문, 성가, 전례문 등이 있고 마지막에는 이처럼 별자리의 상징을 곁들인 달력과 그 계절에 해야 할 노동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서양식 세시풍속인데 12월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바로 제빵이다. 사시사철 신선한 배추가 조달되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김장이 중한데 빵이 주식인 서양인들이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전에 먹을 빵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면 얼마나 큰일이었겠는가.

빵을 구우려면 고온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오븐이 필수인데 중세 유럽의 일반 가정에서 오븐을 구비한 부엌이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대부분은 집에서 반죽을 만들어 시내에 있는 제빵소에서 구워다 먹었으니 이동이 쉽지 않은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빵을 쌓아둬야 했던 것. 당시 성인의 하루 빵 소비량이 평균 900g이었다고 하니, 그 많은 빵을 구워야 했던 12월의 제빵소는 옷을 입을 수 없이 뜨거웠을 것이다. 이렇게 빵을 굽고 나면 1월에 잔치를 하고 2월에는 불을 쬐다가 날이 좋은 5월에 잠시 연애를 하는 것 말고는 1년 내내 농사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고살기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