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이 승승장구하면서,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국립미술박물관에도 인파가 몰렸다. 지난 3일 개막한 한국 단색화 기획전 때문이다. 강영순·김근태·김춘수·김택상·윤상렬·이진영·이진우 등 7인의 한국 대표 작가가 선발돼 베트남 무대에 처음 출전한 것인데, 대중문화에 이은 동남아시아 미술 한류(韓流)의 신호탄 성격으로 해석된다.

지난 3일 하노이 베트남국립미술박물관에서 개막한 전시를 현지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정면에 김택상의 '숨쉬는 빛' 연작, 우측 벽면에 이진영의 '운화몽' 연작이 보인다.

현대미술의 발아가 한국보다 늦은 곳이지만 이날 고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는 여러 연령대가 전시장을 찾았다. 특히 윤상렬(49) 작가는 이례적인 사인 공세까지 받았다. 밀리미터(㎜) 단위 촘촘한 선을 무수히 그어낸 '침묵' 연작을 선보인 그는 "'골 빠지도록' 작업한 섬세함에 반응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창자 빠지도록" 숯덩이 앉힌 한지를 쇠솔로 긁어낸 이진우(60)의 '무제' 연작에도 이목이 쏠렸다. 주베트남한국문화원 주관으로 14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베트남 화가 6인의 작품이 함께 배치됐다. 찡 뚜언 공동 큐레이터는 "새 경향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를 기획한 정준모 큐레이터는 "단색화는 한국적 미학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대표적 양식"이라며 "일본의 구타이·모노하처럼 미술사(史)에 등재하기 위한 밑작업"이라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 전시작 20여점은 단색화가 아닌 단색조(調)로 묶인다. 강영순(자수)·이진영(사진) 등 장르도 다양한 데다, 단지 색(色)이 아닌 "반복을 통한 결의 중첩"을 공통분모로 하기 때문이다. 정 큐레이터는 "그간 단색화는 상업 화랑 주도의 시장성 측면에서 주로 부각돼 왔다"며 "학술적 정립과 차세대 단색화 작가를 위한 자리를 지속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담담한 시각적 촉감이 화면 그 자체를 주목하게 하는 이 작품들의 교집합은 "시간이 흐르면서 행위의 흔적이 중첩된 평면"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탄생한 색은 단색이되 단층(單層)이 아니다. 한 10대 관람객이 흰색 물감이 도포된 김근태(66)의 'Discussion' 연작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최소의 색이지만 여러 궁금증을 일으킨다"고 했다. 김택상(61)의 맑은 피부 같은 '숨쉬는 빛' 연작, 오로지 파랑으로만 화면을 채우는 김춘수(62)의 '울트라마린' 연작은 여성 관람객의 주 사진 무대가 됐다. 김춘수 작가는 "같은 규칙으로 뛰는 축구만 해도 각국의 스타일이 있다"며 "한국적 예술성의 고민을 확인한 이곳 작가들이 자기만의 회화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