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외국인이니까.' 그 말이 제겐 가장 아픈 한국말이었어요."

필리핀에서 온 이주여성 제니(41)씨는 18세 아들을 위해 매일 뉴스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한다. 15년 전 한국에 온 그는 공장 등에서 일하느라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다. 아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한국말을 잘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에겐 "네" "아니요"란 말만 했다. 이유를 묻자 청천벽력 같은 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못 알아듣잖아요."

9일 서울과 인천에 사는 필리핀 출신 이주 여성 7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국말이 서툴러 시어머니에게 반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한국에서 다문화 가정을 이뤄 사는 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과 싫어하는 한국말은 뭘까. 지난달 25일부터 12월 9일까지 서울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서울·인천·부산 등 전국 다문화 가정에 '나를 웃게 한 한국어'와 '나를 울게 한 한국어'를 물었다. 중국·일본·러시아·베트남 등 14국에서 온 157명이 응답했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 7명에게도 그 이유를 물었다.

다문화 가족들이 뽑은 '나를 울게 한 말'엔 '잡종' '냄새 난다' '작은 사람' 등 차별의 의미가 밴 말들이 꼽혔다. '너네 나라'도 자주 듣는 "슬픈 말". '돈 벌러 왔니' '불쌍하다'처럼 동정하는 말에도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말은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였다. 이 말을 특히 "자녀에게 들을 때 슬프다"고 했다. 필리핀 여성 멜로디 아두란(52)씨는 "한국어를 읽을 줄 몰라 아이들 준비물도 챙겨주지 못했다"며 "아이들이 '엄마는 우리보다 한국에 오래 살고도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물을 때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물론 다문화 가족을 웃게 하는 한국말도 많다. '사랑한다'는 말이 '나를 웃게 한 말' 1위로 꼽혔다. 설문에 참여한 29세 중국 여성은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다른 한국인에게 이 말을 들으면 '상대가 나를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친구' '좋은 사람' 등 동질감을 주는 말,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같은 말도 좋아하는 한국말로 꼽혔다. 41세 중국 여성은 "한국인들은 칭찬에 인색한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로 인정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는 삶의 길을 열어주는 소중한 말이다. 필리핀 이주민 전호수(47)씨는 "잘 못할 때 한국어는 세상을 막는 '벽'이었는데, 열심히 배워서 할 줄 알게 된 순간 '길'이 됐다. 그제야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병수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장은 "한국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한국어"라며 "이주민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말로 소통할 수 있게 도와줄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