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그린 옥호정도(玉壺亭圖)는 산과 물의 정신이 완벽하게 담겨 있다는 평을 받는다.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후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한 폭의 그림이 책 몇 권보다 나을 때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 상설전시관이 지난달까지 '옥호정도(玉壺亭圖)' 한 점을 전시했다. '옥호정'이라는 정원을 그린 길이 1.5m, 폭 1.9m의 대형 그림이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1815년쯤 만들었다는 옥호정은 청와대 동쪽 산자락에 있었던 정원이다(삼청로 9길 21 일대). '옥호정도'는 효명세자가 도화서(圖畵署)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외할아버지 김조순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한다.

주산·내룡·혈·명당수·청룡·백호·식재풍수(소나무·버드나무·모란·파초)가 구현되어 한 권의 책보다 더 훌륭한 그림이 되었다. 이른바 "산과 물의 정신이 완벽하게 그려진[寫山水之神] 그림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신을 전달받게[傳神] 한다."(王微, '敍畵') 세월이 흐르면서 옥호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림 소유주도 바뀌어 최종 소장자는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 박사였다. 그러다가 2016년 그 후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언뜻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땅도 변하고 그림의 소장자도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진 '관학(官學)'으로서 풍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후세에게 전한 이가 이병도 박사였다. 그는 역사학자였지만 동시에 풍수학자였다. 그것을 증빙하는 대표적 저서가 1947년에 출간된 '고려시대의 연구'이다. 풍수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문적(文籍)지상주의'를 경계한다. 사료만을 근거로 하는 학문 행위를 비판하며 고려시대 풍수 행위가 발생한 현장들을 반복적으로 답사하였다. 필요한 경우 지관들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답사한 곳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도읍지와 왕궁터로 꼽히던 곳이었다. 장원정·용언궁·대화궁·북소궁·우소궁·좌소궁터 등 대부분 북한에 있다. 그는 답사를 하면서 풍수의 이상적 모델이 무엇인지를 체득한다. 그 결과 '산은 산대로 책은 책대로[山自山 書自書]', 즉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책을 보면 산이 떠오르고 산을 보면 책이 떠오르는 개안의 경지에 이른다. 현장[山]과 이론[書]의 합일 속에 태어난 명저가 '고려시대의 연구'였다.

또 하나 그가 풍수 전문가였음을 증빙하는 사건이 바로 '옥호정도' 소장이다. 어떠한 경로로 구입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960년 학회지 '서지(書誌)'에 '옥호정도'를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다. 그는 '옥호정도'가 기운생동(氣韻生動)한 그림임을 확신한다.

이병도 박사와 풍수와는 어떤 인연일까? 개인 차원의 관심이 아니라 집안 내력이다. 윗대로 올라간다. 부친 이봉구는 충청도 수군절도사 재직 당시 민비(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 묘를 충남 보령의 길지로 이장케 한 사람이다. 풍수적 안목이 없으면 최고 권력자에게 함부로 소개할 수 없는 용기였다. 그 덕분으로 그는 얼마 후 중앙직으로 옮겨간다. 이렇듯 풍수를 체화한 이 박사 집안은 명당발복의 덕을 보았을까? 이병도 박사의 아들 다섯이 모두 박사였고, 손자들 가운데 서울대 총장과 문화재청장이 배출되었다. 그 밖의 후손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뭇사람이 부러워하는 명문가이다.

'옥호정도'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가지 기능을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옥호정도'를 반복적으로 보아주시길 바란다(인터넷 검색 가능). 그림은 분명 독자에게 명당기운을 전해준다[傳神]. 또 하나, '옥호정' 터를 그림 그대로 복원하여 '대통령궁 공식 정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청와대 관저와 인접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풍수상 흉지설에 시달리는 청와대 터에 대한 훌륭한 '비보(裨補)풍수'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