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명씩 대중이 모여 살다 보면 문제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에요. 한번은 대중이 모여서 한 사람을 쫓아내자고 결정했어요. 그때 그들에게 '절은 대장간이다. 쇠붙이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타일러서 결국 그 사람을 졸업시켰지요. 용서는 저의 수행이고 칭찬이 교육의 비결입니다."

한국 현대 비구니계의 산증인인 운문사 회주 명성(眀星·89) 스님이 구순(九旬)을 맞아 자신의 저작을 모은 '법계 명성 전집'(전 20권·불광출판사)을 펴냈다. 전집 출간을 기념해 5일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기자들을 만난 명성 스님은 "출가해서 가장 큰 보람은 제자들이 나보다 나아져서 각계에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순의 명성 스님 거처의 댓돌,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는 동물 인형들이 줄지어 손님을 맞는다. 명성 스님은 “손님들 재미있으시라고 외출할 때마다 하나씩 사모았다”고 말했다.

명성 스님은 현재 조계종 비구니 6000여명 가운데 2100여명을 길러낸 주역이다. 193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스님의 아버지는 유식학(唯識學)의 대가인 관응 스님. 여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던 명성 스님을 출가로 이끈 것도 관응 스님이었다. 1952년 해인사 국일암으로 출가한 스님은 탄허·성능·운허 스님 등 당대의 학승들을 사사하고, 1970년 운문사로 옮겨와 승가대학을 열었다. 처음 운문사에 올 때만 해도 절은 퇴락하고 지붕 기와 사이로 풀이 자라고 있었다. 명성 스님은 학인들을 이끌고 함께 농사지으면서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은 죽, 점심·저녁은 보리밥을 먹으면서 공부했다. 한때 1만5000포기를 담갔던 김장 원칙은 '양은 많게, 간은 짜게, 고춧가루는 적게'였다. 스님은 "공부는 잘하는데 농사일은 못하는 경우는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운문사 승가대학은 한때 농과대학 혹은 육군사관학교란 별명이 붙었다"며 웃었다.

점차 학인들은 늘어나는데 건물은 비좁았다. 스님은 전국의 사찰을 한 바퀴 돌면서 후원금을 모았다. 얼마나 고됐던지 어금니 두 개가 빠졌다. 주지와 승가대학장을 겸하면서 30여년간 그는 30여 동 건물을 신축하고 10개 동을 보수해 오늘날 작은 수목원까지 갖춘 아름다운 절을 만들어냈다.

명성 스님의 상좌인 은광 스님은 "우리 스님 별명은 0.1밀리(㎜)"라고 귀띔했다. 철두철미하다는 뜻.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금전출납부를 꼬박꼬박 쓰고 있다. 출납부에 빨간색은 장학금, 파란색은 불사(佛事) 자금이다. 돈은 생기는 대로 쓸 곳을 찾아서 오래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눴다. 물건도 같은 게 두 개 있으면 하나는 남에게 줬다. 돈에 관한 원칙은 "오래 가지고 있으면 내 것이란 집착이 생겨 내놓고 싶지 않아진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지급한 장학금만 누적 액수로 20여억원에 이른다. 이번 전집 원고 교정도 800시간을 들여서 직접 봤다고 한다. 은광 스님은 "은사 스님의 공덕은 보시 공덕"이라며 "전집도 돌아가시면 우리 제자들이 만들어야 할 텐데, 그 일을 미리 해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명성 스님은 "인생을 돌아보면 별로 힘들었던 일은 없다"고 했다. "우리(사찰)가 힘들 때는 나라도 힘들었고, 모두 힘을 모아 공부하다 보니 힘든 걸 느낄 틈도 없었습니다."

스님의 좌우명은 '즉사이진(卽事而眞)'. 법화경에 나오는 구절로 매사에 진실하라는 뜻이다. 스님은 '답게'를 강조했다. "물건마다 자기 위치를 지키고 역할을 하는 것. 아들은 아들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사는 그런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명성 스님은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싹을 가지고 있다"며 "'나 같은 게…'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 캔 두 잇(I can do it)이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