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 이반 4세(1530~1584)의 별칭은 이반 뇌제(雷帝·Ивáн Грóзный·Ivan the Terrible)다.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로즈니(Грóзный)’라는 이 말이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어서, 대국을 통치하는 지배자라면 의당 갖추어야 할 자질로 친다.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 취급을 당하는 푸틴 대통령이 국내에서 의외로 인기가 높은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반은 모스크바의 궁정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그로즈니'한 자질을 습득했다. 부친 바실리 3세가 사망했을 때 이반은 고작 세 살이었다. 섭정을 맡았던 어머니도 몇 년 후 사망했다. 아마도 귀족들이 독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당시 모스크바 궁정은 걸핏하면 독살과 칼부림이 난무하는 살벌한 암투의 현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반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스스로 터득해 갔다. 그는 15세 때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자들의 혀를 뽑고 목을 베면서 처음으로 '통치 행위'를 시작했다고 후일 회고한 바 있다.

賢君에서 暴君으로 바뀐 이반 4세

1547년 17세의 나이에 이반은 차르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가끔 차르라 불린 적이 있지만, 차르로서 대관식을 한 것은 이반이 처음이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 황제나 몽골의 칸을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공식적으로 차르를 선언함으로써 이반은 자신이 지상신국(地上神國)을 통치하는 황제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광기에 찬 폭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명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서구 국가들의 신분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한 데다가,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행정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카잔과 아스트라한 등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들을 점령하여 볼가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 역사에서 봤을 때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제 이 나라는 모스크바공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불리며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팽창해나가기 시작했다.

‘폭군 이반과 그의 아들 이반’(일리야 레핀 作). 이반 뇌제가 그의 아들을 뾰족한 쇠몽둥이로 쳐서 치명상을 입힌 직후 장면을 상상해 그린 작품. 이 상처로 며칠 뒤 아들은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 이반은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신하들이 보인 불충의 자세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측근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차르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1564년 이반은 돌연 모스크바를 떠나 100㎞ 떨어진 알렉산드로프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추종자들과 함께 검은 수도사 옷을 입고 지냈다. 이곳에서 보인 이반의 행태는 그야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부하들과 함께 술 마시고 광대와 춤을 추고 살인을 서슴지 않는 '악마의 향연'을 벌였다. 그러더니 총주교에게 차르의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귀족들과 시민들이 돌아와 달라고 읍소하자 이반은 두 가지 사항을 약속받고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첫째는 국토를 둘로 나누어 그 중 한 구역을 자신이 마음대로 통치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악당들과 반역자들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두 가지 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국가를 두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직접 통치하려 한 의도가 무엇인지 역사가들은 아직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이상한 조치를 통해 귀족들의 기반을 흔들어놓고 차르의 권력을 강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밀경찰 조직 앞세워 공포 정치

이때 만든 강력한 기구가 오프리치니키라는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처음에 1000명으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6000명으로 늘어난 이 기구는 차르의 적을 잡아 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개 대가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녔다. 차르의 적을 개처럼 물어뜯고 쓸어버린다는 의미다(홍콩 시위 현장에 느닷없이 나타나 빗자루로 거리를 쓰는 특수부대 병사들이 연상된다). 본격적인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가족, 친척, 친구, 하인들도 함께 사라졌다. 체포된 인사의 재산은 몰수되거나 아예 불태워졌다. 차르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린 곳은 지역 전체가 끔찍한 응징을 당했다. 1570년에 배반죄로 정죄된 노브고로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리투아니아와 전쟁 중이던 당시, 노브고로드 귀족들이 도주하여 이곳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가짜 보고가 차르에게 올라갔다. 이반은 오프리치니키를 보내 '피와 불의 진압'을 하도록 지시했다. 가혹한 고문과 살상이 이어졌다. 시민들을 숯불 그릴에 구우며 심문했고, 대주교는 곰 가죽을 입힌 다음 사냥개들을 풀어 쫓도록 했으며, 많은 사람을 썰매에 묶어 얼어붙은 강물에 던져 넣고는 오프리치니키들이 보트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물 위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갈고리나 몽둥이로 물속에 도로 밀어 넣었다. 노브고로드는 완전히 파괴된 후 예전과 같은 지위를 영영 되찾지 못했다.

‘오프리치니키’(니콜라이 네브레프 作). 오프리치니키가 귀족을 붙잡아 차르로 분장시킨 후 조롱하며 단도로 위협하는 장면.

이후에도 이반의 광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반역자들을 색출하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사지 절단, 십자가형, 가죽 벗기기, 솥에 넣고 삶기, 화약통 위에 앉히고 폭발시키기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관대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보이곤 했다. 사실 이렇게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언제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로즈니'한 독재자의 끔찍한 면모다. 통치 말기에 이반은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참회의 행위로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부르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희생자만 4095명에 이르렀으니, 기도 시간이 꽤 길었을 것이다!

이반의 살인 행위의 희생자 중에는 친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이 단정치 않다고 꾸짖는데 아들이 끼어들자 쇠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제일 튼튼한 후계자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병약하거나 천치 상태인 아들들이 차르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오래 못 가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섰다. 로마노프 시대는 20세기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300년 넘게 지속된다.

[말년에 희생자 4095명 이름 부르며 명복 빌어]

모스크바 붉은광장 남쪽에 있는 상크트바실리 대성당은 이반 4세 시대에 카잔과 아스트라한 정복을 기념하여 건축했다. 중심부의 교회 건물을 8개의 작은 교회 건물이 둘러싸고, 여기에 더해 바실리 성인의 묘 위에 10번째 교회 건물을 지었다. '예수에 빠진 바보'로 불리는 바실리 성인은 여자들 사이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니거나 교회에 돌을 던지는 식의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의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성적 타락을 비난하고 '신의 집'에 접근하는 악마를 쫓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인물들은 이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앙에만 근거하여 진리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기행은 세속의 법을 초월하는 신의 언어의 표현이다.

이반 4세 시대에 건축한 모스크바 붉은광장 남쪽의 상크트바실리 대성당. 오른쪽은 크렘린궁의 스파스카야 시계탑.

이반은 바실리 성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바실리 성인이 죽었을 때 직접 관을 들어 옮길 정도였다. 이반의 정치 행위 또한 ‘예수에 빠진 바보’와 통하는 방식이다.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지고의 위치에 놓고 신의 뜻을 받아 통치한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그의 기이한 통치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미친 행위로 보이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는 이 세상에서 신의 질서를 구현하는 합리적 지배다. 이처럼 초월적인 신성성을 근거로 정치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러시아는 서구 국가와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을 가슴에 품고 사는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걸맞게 러시아는 차르가 신의 뜻을 구현하며 통치하는 신성한 전제국가를 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