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지난 7월 인공지능 분야 신임 교수를 뽑았다. 그런데 교수들로 구성된 선발위원회는 지원자의 출신 대학도 지도교수도 알 수 없었다. 지원자의 논문에 적힌 소속 기관과 공동 저자 이름을 보고 학교나 지도교수를 유추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코미디가 벌어진 건 '인적 사항과 학력 등 개인 신상 정보를 보지 말고 교수를 선발하라'는 정부의 '블라인드 채용' 지침 탓이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작년 말 KAIST 등 4대 과학기술 특성화대학에 하달한 이 지침의 명분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정'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KAIST 이광형 교학부총장은 "일반 사무직도 아니고 교수·연구원을 뽑는다면 모든 정보를 동원해 수월성을 검증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답답해 했다.

공정과 함께 한국 과학계에 몰아친 또 하나의 정치 바람이 '적폐 청산'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만든 기초과학연구원(IBS)은 해외 학계가 '한국의 노벨상 프로젝트'라며 부러워하는 곳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작년 말 특별 점검을 시작으로 종합 감사, 그리고 합동 감사까지 1년 내내 조사를 벌였다. 김두철 전 원장과 마찰을 빚었던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구노조는 작년 7월 이후 지금까지 12차례에 걸쳐 성명 발표와 기자회견 등을 하며 정부 조사를 촉구했고, 결국 김 전 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이공계대 총장과 과학기관장들도 대대적인 감사를 당했고 상당수가 중도 사퇴했다. 과학계에선 "점령군식 완장 정치"라는 비판이 나온다.

그사이 현 정부의 이념들은 과학계에서 하나하나 구현됐다. 정부 출연 연구소들은 비정규직 6400여명을 일괄 정규직화하기로 했고, 주 52시간 근무제도 도입했다. 각 연구소들은 낮엔 비(非)연구직 근로자들이 정규직 전환에 직접 고용까지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고, 밤엔 연구원들이 오후 6시에 대부분 퇴근해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과학계가 적폐 청산, 공정, 정규직화, 주 52시간 같은 정권의 핵심 정책을 실험하는 모르모트(실험용 쥐)가 된 사이 한국 과학의 경쟁력은 퇴보하고 있다. 사회주의 중국은 파격적인 연구비와 주택, 교육 특혜를 내세워 우수 연구자를 끌어모으며 최상위 1% 과학자 수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랐다. 2017년 15위였던 한국은 작년 18위에서 올해는 19위로 떨어졌다. 인구가 고작 서울의 절반 정도인 싱가포르(14위)에도 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