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소동으로 나라만 멍이 들었다. 국익에 아무 보탬이 안 됐고 일본에 타격도 못 줬다. "일본이 수출 규제를 철회하지 않으면 파기 철회는 없다"고 배수진을 치더니 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하면서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까지 정지시켰다. 일본이 내놓은 것은 수출 규제 협의를 국장급으로 격상한다는 하나마나 한 약속이었다.

외교적 완패였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던 대통령의 큰소리는 빈말이 됐다. 뒷감당도 못 하면서 만용만 부린 외교·안보 참모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놓고 "판정승을 거뒀다"고 우기기까지 한다. 지소미아 파기가 일본을 움직이는 지렛대라고 꺼내 든 것부터 전략적 오판이었다. 일본은 한국처럼 북한으로부터 직접 위협을 받는 처지가 아니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위성 탐지 능력도 한국보다 월등하다.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못 얻는다고 아쉬울 것이 없다. 지소미아 파기는 일본 입장에서 아무 부담 없이 한국만 궁지에 빠지는 꽃놀이패였다.

우리 외교·안보 라인엔 출구 전략도 없었다. 지소미아 종료 시점이 다가올수록 일본은 느긋해졌고 초조해서 발을 구른 것은 우리 정부였다. 다급해진 대통령은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린 태국에서 아베 일본 총리의 손목을 잡아끌어 예정에 없던 약식 회담을 했다. 청와대는 이 만남을 즉각 발표하면서 양국 간 대화 해결 노력이 재개된 것처럼 포장했지만 일본 측 반응은 냉담했다. '이순신 장군의 열두 척 배'와 '동학 농민군의 죽창가'까지 외치며 요란하게 시작했던 항일 투쟁이 구차스러운 구걸 외교로 쪼그라들었다.

지소미아 파기는 일본의 급소를 찌른 게 아니라 미국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실망감을 표시했고 "한·미 간 사전 협의가 있었다"는 청와대 변명에 "거짓말 말라"고 공개 반박까지 했다. 미국이 지소미아를 살리기 위해 일본 설득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한국을 상대로 최대 압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한·미 동맹만 큰 상처를 입었다. 지소미아 연장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 여론도 극심하게 분열됐다.

지난 3개월 동안 벌어진 이 터무니없는 사태에 대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확실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외교적 참사가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지소미아는 한·미 동맹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국민을 속인 안보실장과 지소미아 파기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처럼 대통령 판단을 흐리게 한 안보실 2차장은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게 상처 입은 나라와 인사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