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에스퍼(가운데) 미국 국방장관이 17일 방콕 아바니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정경두(왼쪽) 국방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방위상의 손을 맞잡고 있다. 처음엔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정 장관과 고노 방위상은 에스퍼 장관이 “동맹, 동맹 맞죠?(allies, allies, right?)”라고 묻자 뒤늦게 웃음을 보였다.

한국 정부가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하고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조치와 관련해 한국과 국장급 회의를 재개하기로 결정한 데는 미국 정부의 중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소미아를 되살리려는 미국의 물밑 노력이 막판에 한·일 양국 정부에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지난 8월 22일 청와대가 지소미아를 종료하겠다고 발표하자 "미국과 우리 동맹의 안보 이익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명한다"고 했다. '강한 우려와 실망'이라는 표현은 동맹국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외교적 표현이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미 정부는 그로부터 3일 후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terminated) 결정이 주한 미군에 대한 위협을 키울 수 있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미국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낸 한국 정부에 민감하게 반응하자 한국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8월 28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지소미아 종료 결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미국 측의 입장을 충분히 알겠으니 공개적인 비판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는 조 차관 면담 다음날 예정됐던 재향군인회 초청 강연 등에 불참하는 등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방침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국방부가 주최한 서울안보대화(SDD)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미 행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철회 압박은 지난 15일 한·미 안보협의회(SCM)를 전후로 절정에 달했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SCM 기자회견에서 "지소미아가 갱신되지 않고 종료되도록 방치하면 (정보 공유의) 효과가 약화되기 때문에 (한·일) 양측이 이견을 좁힐 수 있도록 촉구했다"고 말했다. 에스퍼 장관은 이어 "지소미아가 종료되거나 한·일 관계가 갈등으로 인해 경색 국면에 놓일 경우 이득을 보는 곳은 중국과 북한"이라며 "한·미·일이 공통의 위협이나 도전 과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도록 (한·일) 관계를 정상궤도로 올리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에스퍼 장관은 이날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미 의회도 지소미아 종료 철회 압박에 가세했다. 미 상원은 지난 21일(현지시각) '한·일 지소미아 연장 촉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엔 "지소미아는 인도·태평양 안보와 방어의 토대가 되는 중대한 군사 정보 공유 합의"라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상대하는 데 있어 그 중요성을 재확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은 일본을 향해서도 지소미아 연장을 위한 태도 변화를 강하게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지난 18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한·일,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지소미아 연장을 위한)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며 "지소미아는 한미동맹의 상징성이나 전략적 가치가 크다고 미측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측에 압박을 가하고 우리에게도 지소미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또 "에스퍼 장관이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이 종료될 때 한·일 양측에 '정부에 잘 얘기해서 지소미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한·일 정부가 이날 합의한 지소미아 종료 유예와 한·일 수출 관리 정책 대화 재개 방안도 미국이 제시한 중재안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는 지난 17일(현지시각) 지소미아 동결(freeze) 방안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동결'을 통한 지소미아 종료 유예로 지소미아를 일정 기간 유지한 상황에서 일본이 수출 규제 등과 관련해 양보를 하면 지소미아를 연장하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