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부국장 겸 사회부장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관계 세미나에 참석해 이런 발언을 했다. “새 정권의 성격을 보면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깰 것이다. 한·일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도 역사 분쟁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깨질 것으로 본다.” 세미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선거 캠프 출신 인사가 자신 있게 반박했다. “한·일 지소미아 파기는 논의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보면 안다.” 그는 문 정권에 들어가 지금도 안보 분야 요직을 맡고 있다.

그 후 외교관들에게 물었더니 문 정권도 한·일 지소미아를 한·일 관계가 아닌 한·미 동맹의 틀에서 생각한다고 했다. 극히 정상적인 사고였다. 내 발언이 지나쳤다고 여겼는데 결국 그게 아니었다. 한국이 한·일 지소미아를 파기하면 정보 교류의 이익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미 동맹에서 얻는 이익도 줄어든다. 후자(後者)의 손실이 수백 배 크다. 반면 일본은 정보 교류의 이익만 사라진다. 어떤 이론을 대입해도 이런 구도로 게임에 나서는 자는 멍청이거나 자해공갈단밖에 없다. 국제적으론 한·일 지소미아 파기를 마치 무기인 양 휘두르는 문 정권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 국방장관까지 "지소미아 종료는 중국과 북한에만 이익"이라고 설득한다. 한국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권 인사들은 "미국이 일본을 편든다"고 화를 낸다. 미국이 보기에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정말 한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문 정권의 음모란 얘기가 있다.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한·미 동맹 해체와 중국 패권주의 재편입이라는 종북좌파의 큰 그림에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권 초기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 정권의 안보 라인에서 그런 거대 담론을 주장하고 실천할 만한 인물이 없다. 도쿄 세미나에서 만난 여권 인사의 말은 한때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끝까지 유지할 만한 원칙과 철학, 지혜가 정권에 없을 뿐이다.

한·일 역사 분쟁이 벌어지자 조국씨가 난데없이 '죽창가'를 불렀다. 문 대통령이 '배 12척'을 강조하고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정권의 체면과 명분을 걸었다. 여권에선 반일·친일 몰이로 내년 총선을 치르자고 했다. 그 무렵부터 문 정권이 한·일 지소미아를 무기로 뽑아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을 움직이지 못하는 무능 정권에 밑천이라곤 선동과 도박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에 이어 안보까지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문 정권의 본질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권에선 동맹이 조금 손상된다고 뭐가 큰일이냐는 사고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미국이 반발하면 돈 좀 더 주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정권 유지를 위해 몇십조씩 마구 쓰는, 땀 흘려 돈 벌어본 적 없는 운동권 인사들의 태평한 낙관주의가 부럽다. 참을 수 없어 광장에 나온 국민, 관변 언론에 들러붙지 않아 '문빠'들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기자들만 안달이다.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일본 시마네(島根)대 교수를 종종 떠올린다. 임종(臨終) 전인 10여 년 전 그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일생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영유권 주장을 부인하고 논박한 학자다. 그에게 "앞으로도 어떻게 하면 한국이 독도를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동해를 무조건 평화의 바다로 만들라"고 답했다. 미·중·러·일이 대립하는 동해에서 패권 분쟁이 일어나면 한국 홀로 독도를 지킬 수 없다. 한·미 동맹이 만든 전후 동해의 평화를 지키면 일본은 물론, 러시아와 중국도 어쩔 수 없다는 당부였다.

넉 달 전부터 동해에서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반일(反日) 열풍 속에 이어지는 러시아와 중국의 동해 유린 행위다. 지난 7월 정전 후 처음 러시아 경보기가 한국의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거꾸로였다면 러시아는 한국기를 격추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도 받아내지 못했다. 대신 문 정권은 한·일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해 한·미·일 안보 체계의 균열을 더 키웠다. 파기 선언 두 달 후 한국 전투기가 독도 영공에서 시위하자 러시아는 한국 전투기를 능가하는 신예 전투기를 인근 상공에 투입해 위력을 과시했다. 동해에서 러시아는 한국을 무력으로 압도했다.

한·일 지소미아가 최종 중단되면 가장 먼저 문 정권은 더 뜨거워진 동해를 맞닥뜨려야 할지 모른다. 동맹의 균열이 벌어지는 만큼 중·러의 도발은 더 격화될 것이다. 문 정권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을 약화시킨 최초의 정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