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비공개 지역이었던 경기도 양주 온릉(溫陵)이 대중에게 개방됐다. 온릉은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첫 왕비인 거창 신씨 단경왕후릉이다.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오르고 여드레 만에 이혼당한 왕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세력에 떠밀려 왕이 된 중종은, 역시 반정 세력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했다. 작게는 한 여자의 일생, 크게는 16세기 초반 격랑에 휩싸였던 조선 왕조 정치 이야기.

조용하고 유약했던 중종

모두가 아는 바대로, 연산군은 폭군이었다. 그런 연산군에게 열두 살 어린 이복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이역이다. 1499년 나이 열한 살에 결혼한 이역은 이듬해 민가로 나갔다. 궁을 나가던 날 형은 대신들에게 곡식 7000석과 살 집을 지어주라 명했다. 대신들이 나라 살림을 걱정해도 연산군은 막무가내였다.(1500년 2월 13일 '연산군일기')

하지만 권력다툼 틈바구니에서 왕의 형제들은 숨죽이고 살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때였다. 게다가 그 형은 포악하기까지 했으니 진성대군 이역은 정말 조용하게 살았다. 어릴 적 사냥터에서 이 이복형은 "내 말보다 네 말이 궁궐에 늦게 도착하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해 중종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김시양, '부계기문', 1611) 그러니 곡식이고 뭐고 신축 가옥이고 뭐고 감사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조용하게 살았다. 그런데 6년 뒤 그 이복형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된 것이다.

중종반정과 이혼당한 두 여자

1506년 9월 2일(이하 음력) 반정세력이 궁 밖에 있는 진성대군 집에 들이닥쳤다. 마침내 이복형이 자기를 죽이러 왔다고 생각한 동생이 자결하려고 하자 아내 신씨가 소매를 붙들었다. "군사의 말 머리가 집을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으리." 부부가 사람을 시켜 바깥을 보니 과연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지난주 일반인에게 공개된 경기도 양주 장흥면 온릉(溫陵)은 조선 중종의 첫 아내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 세력에 억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요구대로 아내 신씨와 강제로 이혼당했다. 신씨는 입궐 8일 만에 쫓겨나 평생을 바깥에서 살았다. 중종은 재위 기간 내내 훈구세력과 사림파의 공세에 시달렸다.

반정세력은 이어 광화문에 진을 치고서 반대 세력들을 모두 죽였다. 이조판서 신수근도 그때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수근이 땅에 떨어지자 하인이 엎드려 자기 몸으로 철퇴를 막으니 이심이 모두 쳐 죽였다. 이심이 넷을 죽이니 피가 튀어 얼굴에 가득하고 옷이 온통 빨개졌으나 공(功)을 보이기 위해 며칠 동안 씻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이자, '음애일기', 16세기 초)

남편 자살을 저지했던 지혜로운 아내는 바로 신수근의 딸이었다. 쿠데타 일주일 뒤 반정세력은 "신수근의 친딸이 궁궐에 있으니 밖으로 내치라"고 새 왕에게 요구했다. 왕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를 어찌하랴"고 답했다. 즉각 그들이 반격했다. "대계를 위해 결단하시라." 그러자 왕은 머뭇댐 없이 "마땅히 밖으로 내치겠다"고 답했다. 그날 저녁 신씨는 궁궐 밖으로 축출됐다.(1506년 9월 9일 '중종실록') 다음 날 "신씨가 나갔으니 왕비 책봉 차비를 미리 거행하라"는 요구를 왕은 그대로 수용했다. 또 보름 뒤 반정세력인 구수영이 "내 아들이 연산군의 사위였는데, 이제 장인이 죄인이 됐으니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왕은 이 또한 허락했다. 여전히 유약했던 왕은 자기의 이혼도, 남의 이혼도 모두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8일 만에 쫓겨난 왕비와 이혼당한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는 오래도록 한집에 살며 한을 삭였다.

끝없이 휘둘린 중종

1년이 지난 1507년 8월 마침내 새 왕비가 책봉됐다. 반정 공신 우두머리 박원종의 사돈 집안인 후궁 파평 윤씨였다. 1515년 봄 왕비가 아들을 낳았다. 엿새 뒤 왕비는 "꿈에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고 했다"고 말하고 죽었다.(1515년 3월 7일 '중종실록') 억명은 훗날 중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이다. 왕비는 장경왕후 시호를 받았다.

왕비가 산후병으로 죽고, 새 왕비 책봉이 거론됐다. 세간에서는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논의가 일었다. 반정공신들이 자기네 목숨 부지를 위해 만든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그해 8월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목숨 보전을 위해 국모를 병아리새끼 팽개치듯 내쳤으니 울분을 품은 지 오래"라고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515년 8월 8일 '중종실록')

단경왕후 신도비. 6·25 때 총격 흔적이 처참하다(왼쪽). 오른쪽은 전남 화순에 있는 중종 때 사림파 조광조의 유허비. 조광조는 거친 개혁 드라이브 끝에 유배지인 화순에서 사약을 받았다.

자기를 살려준 조강지처였으니 중종 또한 복위 논의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공신들이 반대하자 중종은 "왕후가 죽자마자 울분을 품어왔다고 말하니 평소 마음을 알겠다"며 이들의 벼슬을 박탈하고 귀양을 보내버렸다.(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1517년 중종은 장경왕후의 8촌인 파평 윤씨를 간택해 새 왕비로 삼았다. 문정왕후다. 중종은 후궁이 여럿 있었으나 이들 또한 권력 투쟁 과정에 모두 배제됐다.

17년 만인 1534년 드디어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그때 장경왕후 소생 왕자 억명은 열아홉 살이었다. 10년 뒤 중종이 죽고 세자 억명이 인종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1년 뒤 인종이 어이없이 죽었다. 억명이라는 이름과 달리 서른 살에 요절했다. 세자도 없었다. 그리하여 권력을 등에 업고 미모를 내세워 활개치던 후궁들 틈에서 절치부심하던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명종이다.

끝내 아내를 찾지 않은 남편

그사이에 중종은 혁신 사림파 조광조를 등용했다. 끝없이 공신들을 공격하는 사림을 공신들은 두고 보지 않았다. 후궁들과 연합해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았다. 폐비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중종 역린을 건드리기 시작한 조광조는 결국 1520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어 벌어진 공신들 내부 투쟁에서 후궁 경빈 박씨가 주술을 동원한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폐비 신씨는 서울 인왕산 치마바위에 하루같이 다홍치마를 걸어놓고 남편을 그리워했다는 민담도 전한다. 하지만 남편 진성대군, 국왕 중종이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아내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징벌로 배척했던 남편이었다.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죽었을 때 해산을 돕던 의녀 장금을 벌하자고 하자, "아이를 낳는 데 공이 있었으니 큰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던 왕이었다.(1515년 3월 21일 '중종실록')

뿔뿔이 흩어진 왕과 왕비들

끝내 복위되지 못한 신씨는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한창 권력을 구가하던 1557년까지 살면서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공신에게 휘둘리던 겁쟁이 남편이 사림파에게 또 휘둘리던 모습을 다 보고 그녀는 일흔 살에 죽었다. 신씨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거창 신씨 선산에 묻혔다.

서울 강남에 있는 중종의 능 정릉. 정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불태워 텅 비어 있다. 함께 있는 성종 부부 능인 선릉도 훼손됐다.

장경왕후가 죽고 왕후는 경기도 광주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천장됐다. 지금 경기도 고양 서삼릉에 있는 희릉이다. 중종 또한 희릉 옆에 묻혔다. 그런데 1562년 중종은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멀리 떨어진 한강 남쪽으로 천장됐다. 서울 강남 선정릉의 정릉이다.

문정왕후는 3년 뒤 아들 명종의 통치를 지켜보며 죽었다. 원래는 천장된 정릉 중종 묘 옆으로 땅을 잡았으나 비가 오면 땅이 침수돼 결국 태릉에 장사지냈다. 태릉은 서울 노원구에 있다. 실록 사관은 '같은 묘역에 묻히려는 왕후의 계책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록했다.(1565년 5월 30일 '명종실록') 사후까지 이어진 투쟁 끝에 왕과 세 왕비가 모두 따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왕릉들의 기이한 훗날

왕과 왕비들이 죽고 세월이 흐르니,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해 9월 일본군이 중종릉인 정릉을 파헤치고 관을 불태웠다. 중종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지금도 정릉 봉분 속 관은 비어 있다. 석 달 뒤 문정왕후의 태릉과 그녀 아들 명종의 강릉 또한 일본군에게 훼손됐다. 단경왕후의 온릉, 장경왕후의 희릉은 무사했다. 폐비 신씨는 1739년 영조 때 복위돼 단경왕후 시호를 받고 무덤 또한 왕릉으로 격상됐다. 온릉 주변은 6·25 때 전쟁터로 변해 비각 속 신도비는 탄흔투성이고 봉분을 지키는 석마(石馬)는 턱이 달아나고 없다. 여기까지가 16세기 초 왕비를 둘러싸고 조선 왕실에서 벌어졌던 권력 투쟁의 한쪽 얼굴이니, 참 덧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