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前 금융위원장

본래 ’2020′은 완벽한 시력과 시야를 뜻하는 서양식 표현인데 2020년 세계 경제는 높은 불확실성의 짙은 안개에 싸였다. 경기 악화 못지않게 더 커지는 정치적 리스크(위험) 때문이다. 미·중 무역 협상 1단계 합의 기대로 증시 분위기는 개선 조짐이지만 결과를 예단하긴 어렵다. 중국의 미국 농산물 수입과 관세 철회 명문화 문제로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합의 서명 장소에 대한 이견도 나온다. 탄핵 위기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장소는 미국 중서부 곡창지대 아이오와(Iowa)로, 2020년 11월 대선의 첫 행사인 코커스(당원 대회)가 내년 2월 시작되는 곳이다. ‘경제는 정치’라는 말을 실감하는 때다.

지난주 국제 신용 평가사 무디스(Moody's)는 내년 전 세계 신용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유혈 충돌로 치닫는 홍콩 사태와 볼리비아·아르헨티나·칠레를 위시한 중남미의 동시다발적 정국 혼란 등 지정학적 악재가 경기 둔화를 심화시킨다는 어두운 전망이다. 지구촌 곳곳의 사회적 갈등이 포퓰리즘 정책을 부추기는 현 상황은 신용 위험을 키우고 정치적 불안은 경제 펀더멘털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협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글로벌 불황 속에서도 정치와 정책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는 나라가 물론 있다. 남유럽 재정 위기의 후유증에 시달린 유럽연합(EU)의 기둥으로 건전 재정의 대명사가 된 독일과 포퓰리즘 열풍 속에서도 개혁 리더십을 보여준 프랑스는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글로벌 위기서 돋보이는 독일·프랑스

세계 4대 경제 대국인 독일은 재정 관리가 가장 엄격한 선진국으로 꼽힌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유럽중앙은행(ECB)은 재정 상태가 양호한 국가들의 '나랏돈 풀기'를 압박하고 있으나 독일은 단기 부양을 위한 재정 확대에 단호히 선을 긋고 있다. 이달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독일의 통일 비용은 1조유로(약 13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부흥을 이룬 '라인강의 기적' 덕분에 버텨왔고 철저한 균형 재정 기조가 뒷받침해왔다. 독일어 'schuld'는 '빚'과 '죄'의 뜻을 동시에 지닌 단어로, 방만한 재정 운영은 미래 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독일과 함께 한국은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로 꼽히지만 큰 차이도 있다. 향후 국가 채무 비율의 IMF 추정치를 보면 독일은 꾸준히 개선되는 반면 한국은 현재 40% 미만에서 3년 후 50%를 넘는 악화 추세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적자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서 국고채 금리가 높아져 기준금리 인하의 경기 부양 효과를 상쇄하는 우리 현실도 다르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낮췄으나 국내 채권시장에서는 사상 최대 재정 적자에 따른 내년 60조원 규모의 국채 발행 우려로 금리는 오히려 상승세다.

문재인 대통령과 비슷하게 최근 5년 임기의 절반을 지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강성 노조 때문에 시간당 임금이 유럽 평균 대비 40%나 높아 '유럽의 병자'라던 프랑스가 '노란 조끼'의 거센 반발에도 노동 개혁과 법인세 인하 등 친시장 개혁에 성과를 내고 있다. 취임 당시 10%에 달하던 실업률은 10년 새 최저치인 8.5%로 낮아지고 투자가 살아나면서 경제 회복세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민감한 홍콩 이슈까지 제기하며 국제 외교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마크롱의 중국식 이름은 '馬克龍(마커룽)'으로, 풀이하면 '용(중국)을 꺾는 말'이란 뜻이다. 중국에 할 말은 하면서도 최근 17조원 규모의 경제협력을 체결했다. 美·日 등 기축통화국과 긴밀 협력 절실

한국은 지난 2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회원국 중 잠재성장률이 크게 떨어진 나라 중 하나다. 실질성장률에서 잠재성장률을 뺀 '총생산 갭'(GDP Gap)은 2015년 마이너스로 돌아선 후 2017년부터 OECD 평균치 이하로 떨어져 올해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마이너스 GDP 갭이란 기초 체력만큼의 실력도 못 내는 저조한 성적이고, 투자로 치면 벤치마크에 미달하는 저수익에 해당한다. 성장률 하락을 반전시키려면 민간 기업 활력과 노동생산성을 높일 과감한 구조 개혁과 경제 체질 개선이 선결 조건이다. 재정 자금은 경기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지만 과하면 부작용을 키우는 법이다.

도전적인 외부 정치 경제 여건에서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한·미 동맹과 한·일 관계의 악화다. 높은 파도에 대비할 튼튼한 방파제를 쌓으려면 미·일과 같은 기축통화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필자가 금융위원장으로 있던 2008년 11월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해외 투자자 상대 국가 IR(홍보)차 뉴욕에 급히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뉴욕 연준(Fed) 총재였던 티머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을 만나 금융 위기 조기 극복의 결정적 계기가 된 통화 스와프 지원에 고맙다는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이런 답을 했다. “성공적 한·미 통화 스와프는 미국이 감사받기보다 한국이 축하받을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깊은 신뢰 덕분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안보든 경제든 동맹국과 신뢰 관계를 강화하는 일은 우리 정부가 취할 최선의 선제적 위기 대응책이다. 이번 주 판가름 날 지소미아 문제도 한·미 동맹의 가치와 신뢰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