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코드 미디어 디렉터

몇 달 전 미국 동부의 한 아이비리그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축제를 진행한다고 하기에 큰 기대 없이 아이들과 함께 행사가 진행되는 캠퍼스 내 한 강당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 유튜버 중 한 사람이 무대에서 과학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뒤늦게 자세히 살펴보니 그날 행사 전체의 흥행은 그 학교 교수들의 순서가 아닌, ‘베리타시움’이라는 계정 이름으로 유명한 그 유튜버의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이 책임지고 있었다.

물론 발표는 아주 재미있었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그 사람의 유튜브 채널을 열심히 보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봤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은 개의치 않았다.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수십, 수백 번 들어 잘 알면서도 굳이 공연에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날 저녁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저 그를 보러 온 것이었다. 진행자가 질문하면 객석에서는 일제히 손이 올라가고, 실험을 할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인기 가수 공연을 보는 느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가수나 영화배우는 이제는 기획사나 에이전시 없이 성장할 수 없는 반면, 인기 유튜버는 기획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팬들을 확보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플루언서 추천 제품이 신뢰받는 세상 유튜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곳곳에 엄청난 팔로어를 끌고 다니는 유명인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인플루언서'라 부른다.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1996년 이후 출생한 'Z세대'의 4분의 3이 소셜미디어에서 인플루언서를 팔로하고 있고, 그중 대다수가 영화배우나 가수처럼 전통적 연예인보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브랜드나 제품을 더 신뢰한다. 그들에게 인플루언서 즉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인플루언서는 언뜻 과거의 '파워 블로거'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영향력과 도달 범위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인기 유튜버가 수십억원 수입을 올린다는 얘기가 전부가 아니다. 그들의 존재로 업계의 돈 흐름이 바뀌면서 미디어 산업이 재편되는, 그야말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입시(Ipsy)라는 화장품 구독 서비스 회사는 홍보비를 인플루언서에게 몰아주면서 돌풍을 일으켰고, 그 효과에 놀란 화장품 회사들이 뒤를 이어 올 한 해만 수십억달러를 인플루언서와 소셜미디어 홍보에 쏟아부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입시의 창업자가 미셸 판이라는 인기 뷰티 유튜버라는 사실이다. 화장품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글로시에(Glossier)라는 회사 역시 뷰티 블로거가 설립해서 백 년 넘은 화장품 명가들과 경쟁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과거에는 생산과 유통이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었지만, 생산은 개발도상국에, 유통은 물류 기업과 온라인 서비스에 맡길 수 있는 오늘날에는 브랜딩과 홍보의 힘이 훨씬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의 등장 배경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미디어를 하기 위해서는 고가의 윤전기를 설치하거나, 송신탑과 방송 장비를 갖춰야 했지만, 이제는 모바일 기기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하고, 유통은 소셜미디어로 하기 때문에 사실상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즉 일개 유튜버와 대형 방송국이 온라인이라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고, 이런 세상에서 핵심 경쟁력은 출연자의 실력이지 비싼 장비와 유통망이 아니다.

언론 안 통하고도 지지층 모으는 정치인들 전문가들은 이런 인플루언서의 인기를 한때 유행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고, 이들은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포퓰리즘을 대표하는 두 정치인인 트럼프 대통령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 의원은 유권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이는 그들이 다른 정치인들처럼 언론 매체를 통하지 않고 소셜미디어로 유권자들과 직접 소통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심지어 "(십대들에게 유행하는) 틱톡이 대통령을 뽑는 날은 반드시 온다"고 했다. 그게 사실일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트럼프 이후로 소셜미디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어떤 정치인도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동네의 작은 식당부터 수퍼 럭셔리 자동차 업체까지 인플루언서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큰돈을 써가며 노력하고 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인플루언서들이 몰려들어 공짜 서비스 요구나 지나친 홍보성 콘텐츠 남발 등 '인플루언서 피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가 장기적으로 판매자와 소비자들에게 이익인지는 알 수 없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여서, 트럼프를 비롯해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필리핀의 두테르테처럼 인플루언서로 최고의 권력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서 소셜미디어 기술에서 비롯된 인플루언서 문화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기술 발전이 오히려 사회·문화적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류에게 제법 익숙한 두려움이다. TV·인터넷·모바일 기술이 등장했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인쇄술 발전으로 독서가 늘었을 때도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에 미칠 악영향을 두려워했다. 부작용이 전혀 없는 기술은 없다. 하지만 인류는 항상 해결책을 찾아 적응해왔다. 소셜미디어와 인플루언서 문화는 좋든 싫든 인류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왔고, 이를 활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