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만난 배우 윤정희(75)는 남에게 머리를 맡기지 않았다. 늘 그랬듯 40년을 함께 산 피아니스트 백건우(73)가 작은 빗 하나를 꺼내 아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빗어내렸고, 그는 아이처럼 몸을 기댄 채 멍하니 먼 데를 바라봤다. 곧잘 웃었으나 했던 말을 또 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금세 잊었다. 그보다 2년쯤 전엔 방금 헤어진 기자에게 전화해 "당신 이름이 낯익다. 누구시냐?"고 묻고, 끊으면 또 전화해 다시 물었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윤정희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남편 백건우가 10일 밝혔다. 3년 전만 해도 아내의 상태를 알리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그였다.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아동·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는 본지 통화에서 "증상을 보인 건 4~5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라고 명확히 들은 건 3년쯤 됐다"며 "그 뒤로 속도가 빨라져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딸(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2016년 7월 본지 인터뷰 때 백건우가 빗을 꺼내 윤정희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는 모습. 머리를 다 빗은 뒤 윤정희는 백건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메르시(고마워).”

1966년 1200대1 경쟁률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데뷔한 윤정희는 '독짓는 늙은이', '석화촌', '화려한 외출' 등 330여 편 영화 중 325편에서 주연을 맡았고, 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우주연상만 스물다섯 번 받았던 스타다. 2011년 이창동 감독 영화 '시'로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과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오피셰'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역할이 치매를 앓는 '미자'였다.

6남매 맏딸인 윤정희는 클래식을 즐겨 듣고 틈날 때마다 책을 읽던 문학소녀였다. 배우가 되더라도 화려하게 살고 싶진 않아 이름도 본명인 '손미자' 대신 고요할 정(靜)을 넣어 정희로 바꿨다. 1976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백건우와 살림을 차린 이후 그림자처럼 남편 곁만 지켰다. 가정부 한 번 쓴 적 없이 손수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백건우가 자택 2층에서 연습할 때면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연주를 들었다. 공연을 위해 전 세계를 돌면 당연한 듯 따라가 챙겼다.

2011년 6월 부부는 낭만 가득한 무대도 선보였다. 당시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앙코르 무대에 깜짝 올랐던 윤정희는 낭랑한 목소리로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하고 싶은 한!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라며 시를 읊었다. 19세기 독일 시인 프라일리그라트의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였다. 백건우가 이 시에 리스트가 곡을 붙인 '사랑의 꿈'을 그 자리에서 반주했다.

백건우에게 윤정희는 엄마이고 누나였다. "단 한 번도 아내 없는 삶을 상상한 적 없다"던 그는 "음악엔 그 삶이 묻어나는 건데, 아내가 아프고 난 뒤로 피아노 소리가, 내 음악 어법이 달라진 걸 느낀다"고 했다.

남편의 공연은 물론이고 인터뷰 때도 빠지지 않고 동행했던 윤정희가 자취를 감춘 건 올 초부터. 지난 1월 모친상을 치르느라 잠시 한국에 온 윤정희는 한동안 여의도에 머물렀다. 지금은 파리 근교에서 딸과 함께 요양 중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같이 수정도 하고, 의상도 찾으러 다닐 만큼 부지런했던 아내는 이젠 아파트 밖으론 나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 만나는 걸 피곤해하고, 그저 조용히 있길 원해요. 진희가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알아보질 못하니…. 너무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