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날

은행잎이 11월 그늘을 끌어들이자 사그락사그락 햇살이 궁구르는 길 위로 진눈깨비 날렸다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내려앉은 구름이 웅덩이 속에서 흘렀고 서리 맞은 호박잎이 밭머리에 누렇게 스러져가는 바람을 흔들었다 발자국으로 내려놓은 이파리 위로 번진 노을 가슴에 담아놓고 가도 좋은 것을 벚나무 그늘이 깊어서 쓸쓸함이 박새 발가락으로 흔들렸다 나를 스치는 것들이 햇살에 부딪쳐 스러지던 날 아우, 저승길 걷기에 참 좋은 날

―박경희(1974~ )

기온이 내려갈 때마다 하관(下棺)을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몸뚱이 가진 모든 생은 땅 위에서 살다가 결국 혼(魂)은 날려 보내고 육신[魄]은 땅 아래로 스미게 마련이지요. 곡식들 다 익힌 햇볕도 이제 쉬어야 한다는 듯이 식어지는 11월이다 보니 어느 날 영점 아래로 내려간다는 소식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리 되면 지상에 마지막 남았던 철없는 풋것들은 된서리 아래로 하관을 하게 되지요. 깊은 시간의 지층에 숨어서 몸 바꿔 새로운 부활을 도모하지 못한 어리석은 것이었으니까요.

흩어진 이파리들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모두 제자리로 귀의한 ‘발자국’ 같습니다. 잎 진 ‘벚나무’ 끝가지에 박새 하나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거기 남은 가늘디가는 흔들림은 쓸쓸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 청명의 하루는 모처럼 죽음을 생각하기에 맞춤한 날입니다. 죽음을 선험하지 않은 삶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니 ‘참 좋은 날’ 맞습니다. ’11′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니 개운해서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