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 문화부 차장

프랑스 남부 페르피냥에 사는 대학생 크리스토프는 일주일에 한 번씩 멀리 떠날 채비를 한다. 목적지는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에 있는 한글학교. 장장 왕복 400㎞ 거리다. 기차를 타거나 차를 몰아 오고 가는 데 꼬박 4시간.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설렌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세 시간의 한글 수업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생김새며 말소리, 들리는 소리 모두 아름답고 신비로운 언어에 푹 빠져버렸다고 했다.

몽펠리에 한글학교의 또 다른 대학생 쥐페는 얼마 전 선생님에게 어려운 고백을 했다. 연간 수업료 220유로(약 28만6000원)를 한꺼번에 내는 게 부담스러우니, 22유로씩 열 번에 나눠서 낼 수 없느냐는 부탁이었다. 한글과 한국 문화를 정말 배우고 싶은데, 목돈을 낼 형편이 안 된다는 얘기였다. 프랑스 대학의 등록금은 연간 170유로 정도다.

지난달 몽펠리에에서 만난 이장석 한글학교 교장은 "100㎞, 200㎞ 떨어진 곳에서도 배우러 오겠다는 이부터 늙어 죽기 전에 한글을 익히고 싶다는 70대 노부부까지 그저 '한글이 좋아서' 한글학교 문을 두드리는 현지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인구 45만명 소도시 몽펠리에의 한국 교민은 100여명. 2005년 학생 6명으로 시작한 한글학교 학생은 지난해 기준 158명을 돌파했다. 전체 교민보다 많다. 이곳에서 통칭하는 한국 혈통(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한·한 가족, 한·불 가족, 입양아 가족) 학생은 40여명. 나머지 70%가 현지인이다. 한글학교 설립 목적은 재외 동포 교육을 위해서라지만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현지인들의 열망을 언제까지나 배척할 수는 없었다. 부쩍부쩍 느는 학생에 처음엔 K팝 등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겠거니 했단다. "2~3년 전쯤 K팝을 달고 살던 한 중학생이 그래요. 한국의 수의학 기술이 뛰어나다며 한국으로 유학해 수의학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국이 정말 좋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언어·문화 등을 통한 국가적 매력 상승. 조셉 나이 미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설파한 '소프트 파워'를 이만큼 잘 보여주는 게 있을까. 축적된 문화 유산으로 일군 '한국' 브랜드의 저력은 K팝을 뛰어넘는다. 1990년대 시작된 한국 드라마 인기와 K뷰티, K푸드 등 식으려면 불붙고, 대륙을 옮겨가며 이어달리기처럼 해외 팬을 줄 세우는 문화적 '끓는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K 열풍'은 주로 특정 문화·사회 콘텐츠에 국한됐던 것도 사실이다.

전 세계의 디지털 세대는 다양한 플랫폼으로 빠르게 한국을 흡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회, 즉 우리의 수많은 콘텐츠를 해외에 알리고 전파할 무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영국과 미국적인 것이 영어를 통해 세계적인 것이 되었듯, 이제 우리의 것도 한글을 통해 세계적인 것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인프라는 이미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