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 정치부 기자

영화 보러 안 간 지 꽤 됐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다. 요즘 취재 현장에 있으면 매일이 그냥 영화다.

7일 상황을 보자. 이날 오전 국회 예결위에 출석한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의 휴대폰이 사진기자 카메라에 포착됐다. 엄청난 문자메시지가 찍혔다. 지난 2일 삼척으로 내려온 북한 주민 두 명을 오후 3시 판문점에서 송환하려는데 자해 위험이 있어 경찰이 에스코트를 한단다. 송환 관련해 국정원과 통일부 간 입장 정리가 안 됐다는 말도 있었다. 죄다 공개된 적 없는 얘기였다. 한 편의 '정치 스캔들 영화'가 시작되나 싶었다. 마침 국회 외교통일위, 국방위, 정보위가 열리는 날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일단 송환을 중지하라고 아우성치고, 통일장관은 절차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한다고 버텼다.

오후 3시 12분 북송을 마친 정부가 해명을 내놓자 장르가 급변했다. 송환한 두 사람은 오징어잡이 목선을 타던 어부인데 선상 반란을 일으켜 무려 16명을 죽이고 도망치다가 이틀에 걸친 우리 해군의 추격에 잡힌 거란다. 대량 살인범이 등장하는 '범죄 영화'라는 얘기인데, 진상이 영원히 미궁에 빠지는 '미스터리 스릴러'로도 보였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수호하자고 그토록 외치는 '항행의 자유'가 우리 동해에서는 확실히 보장된다는 사실뿐이었다. 중국·러시아 전투기들이 그 영공을 멋대로 드나들었듯, 길이 15m짜리 나무배를 탄 북한 어민들도 그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얼핏 '스파이 영화'다.

이렇게 장르가 뒤섞여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이 최근 보는 '영화 같은 실화'의 특징이다. 지난 4일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때도 그랬다. 죽창가를 부르며 장대한 '항일 투쟁 서사시'를 찍을 것 같던 정부가 돌연 장르를 바꿨다. 방콕 노보텔 호텔의 정상 대기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이끌어 굳이 소파에 앉혔다. 올해 일흔셋이 된 국가안보실장은 얼른 사진을 찍었다. 그걸 증거 삼아 청와대는 한·일 정상이 '11분 환담'을 했다고 발표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연장을 압박하는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줄거리가 너무 엉망이라 영화로 치면 무슨 장르인지도 헷갈렸다.

그러나 '북송 스릴러'가 잔혹한 현실인 것처럼, 이런 영화 같은 외교 현장도 결국엔 현실 생활에 직결된 것이다. 지난달 23일 이낙연 총리를 따라 일본에 갔다가 만난 재일민단 문교국 부국장 서순자(56)씨는 한·일 관계의 '새드 엔딩'을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정부 관계자가 일본에 오면 민족학교에 가지만, 제일 어려운 입장에 있는 아이들은 일본 학교에 다니는 99%의 재일교포 아이들이에요. 학교에서 이지메(따돌림)가 없을까 매일 걱정합니다. 한·일 관계가 지금 상태로 계속 나가면 그 아이들이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싫어서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아주 슬픈 이야기지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무거운 란도셀을 메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는 작은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혐한(嫌韓)이 트렌드가 된 일본 사회에서 '조센징'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의 삶에는 어떤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까. 서씨는 정말 간곡히 말했다. "(문) 대통령에게 뭔가를 말씀드릴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의 일도 확실히 시야에 넣어서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생각해 줬으면 합니다." 서씨에게, '재일 6세(六世)'가 나오도록 대한민국 국적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해피엔드'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이건 '외교 쇼'만으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