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부의 키스 크라크 경제차관,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제임스 드하트 방위비 분담 협상 수석대표 등이 5일 동시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미 간에 첨예한 현안이 산적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크 내퍼 국무부 한국·일본 담당 부차관보도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SED)에 참석하는 크라크 차관과 일정을 같이할 것으로 알려져, 국무부에서 한국 업무를 다루는 주요 당국자들이 전부 서울에 집결하는 기현상을 목격하게 됐다. 특히 국무부 정치군사국 소속 안보 협상·협정 담당 선임보좌관으로 현재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을 진행 중인 드하트 대표가 따로 서울에 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경제·안보를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대(對)한국 압박이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번 동시 방한에서 이들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복원 ▲인도·태평양 전략과 화웨이(華爲) 퇴출을 비롯한 중국 견제 정책 참여 권유 등 크게 세 가지를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통상 당국 간 협의가 진행 중인 한국 자동차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문제가 일부 논의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무엇이 논의되든 핵심은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더 많은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될 전망이다.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드하트 대표는 이번 비공식 방문을 통해 3박 4일간 한국에 머무르며 국회·언론계 인사들과 주한미군 관계자 등을 만날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달 서울에서 개최해야 하는 3차 회의 일정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측 수석대표인 정은보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 대사와는 한 차례 만찬만 같이할 예정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드하트 대표의 비공식 방한에 대해 "서울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합리적이고 공평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들어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문학적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 미국 측에서 그 정당성을 설득하는 여론전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2박 3일 일정으로 방한한 스틸웰 차관보는 6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 조세영 외교부 1차관, 정석환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등을 만날 예정이다. 지난 7월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만났던 그는 이번에도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면담할 것으로 전해졌다. 스틸웰 차관보는 우리 정부의 종료 선언으로 11월 23일이면 무효화되는 지소미아의 복원을 위해 우리 정부를 최대한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방한 전 일본에 들른 그는 지난달 26일 주일 미국 대사관 기자회견에서 "지소미아로 돌아올 것을 한국에 촉구하고 싶다"며 "경제적 과제가 안보 과제로 파급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에 불만이 있더라도 그 대응책으로 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꺼낸 건 잘못이란 얘기다. 한·일 관계를 담당하는 조 차관과 만남에서 지소미아와 얽혀 있는 징용 배상,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가 논의되긴 하겠지만 '일본이 수출 규제를 먼저 풀어야 지소미아 복원이 가능하다'는 우리 정부의 논리가 얼마나 미국 측에 설득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크라크 국무부 경제차관과 내퍼 부차관보는 6일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를 한 뒤 7일에는 이와 관련해 외교부·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국무부가 공동 주최하는 한·미 민관 합동 경제포럼에 참석할 예정이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신남방 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연계해서 아세안 지역에서의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이 주로 논의될 예정이라고 외교부는 밝혔다. 최근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 등 글로벌·역내 전략과 관련,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추세다. 이를 감안하면 이 문제에 대한 압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일본 담당으로 지난 2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의 경색에도 지소미아는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내퍼 부차관보가 서울에서도 공개적으로 같은 요구를 할지도 주목된다.